"당신 집 마당에 수선화가 피었어."
  "그랬겠지요."
  심드렁한 목소리 뒤에 숨어있는 한숨이 건너온다. 짐짓 명랑한 소리로 한번 다녀가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빈집의 썰렁한 기운이 느껴진다. 지금쯤 하마 수선화가 피었을 텐데 싶어 대문을 흔들어보았지만, 잠겨있어 들어가 볼 수가 없다. 낮은 담장 쪽에서 깨금발을 딛고 들여다보니, 텃밭이 온통 광대나물 꽃으로 덮여있다. 그녀가 있었다면 부지런한 손이 밭을 놀리진 않았을 텐데. 시금치며 파를 소담스레 길러놓고 한주먹 뽑아가라고 할 텐데.

  마당 한 귀퉁이엔 수선화가 무리지어 피어있다. 환한 꽃대를 들고 잎을 부챗살처럼 세운 모습이 의기양양해 보인다. 현이네 집에 있는 수선화는 부화관이 금빛 술잔같이 생겼고 밑에 여섯 장의 백색 꽃잎이 있어서 이것을 금잔은대라고 부르기도 하는 마그네트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 라는 솔로몬왕의 잠언과 닮았구나.

  그 꽃이 피면 그 집 마당은 축제 같았다. 수선화가 보고 싶어 가보면 마당이 자꾸 좁아지곤 했다. 포기가 차면 둥근 땅속줄기를 자꾸 나눠심던 손길. 그러다가 온 마당이 수선화 밭이 되겠는걸. 그랬더니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웃던 표정이 눈에 선하다. '두 조각의 빵이 있으면 한 조각은 수선화와 바꿔라. 빵은 몸에 필요하나 수선화는 마음에 필요하다.'는 성인의 말을 이뤄가는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결국 현이 아빠는 오랜 암 투병 끝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정 깊은, 요즘 보기 드문 그녀가, 왜 그런 엄청난 일을 겪어야 하는지. 금슬도 좋았는데 어린 자식들을 놔두고 남편이 먼저 가버리다니. 결국 남은 식구들조차 도시 아파트로 떠나고 그 곳은 빈집이 되었다.

  그래도 수선화는 남아서 여전히 꽃을 피웠다. 수선이라는 말은 성장에 많은 물이 필요하다고 붙여진 이름이고, 물에 사는 신선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지간한 가뭄이 아니면 물주기에 신경 쓰지 않아도 잘 자란다. 그래서 해가 잘 드는 곳이라면 여느 집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수선화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한 미소년 나르시스에 대한 신화가 얽혀 있는 식물이다. 이 나르시스는 못물에 비친 자신의 미모에 너무 황홀해 하다가 죽음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꽃말이 자기애, 자기주의 등으로 표현된다. 이런 점에서 다소간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많다.

  하지만 자신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자만이 가슴에 사랑이 충만하다. 그것이 흘러넘쳐 곁에 있는 사람을 적신다. 마치 수선화가 필 때 고운 향기가 그윽한 것도 부요한 결과로 여겨진다. 꽃을 피우려고 겨우내 참으며 간절히 원해왔을 터. 신이 기도를 들으실 때 흠향한다고 하지 않은가. 수선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모습을 보세요. 존귀의 관을 쓰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꽃망울을 물고 있는 화단의 수선화를 화분에 옮겨 심어 책상위에 놓았다. 꽃은 빨리 피웠지만, 지나치게 올라온 꽃대를 지탱하지 못하고 누워버린다. 수선화는 찬바람이 부는 바깥에서 제대로 꽃을 피우는구나. 다시 화단으로 옮겨 놓는다.

  현이네가 겨울을 벗고 찬란한 봄을 나누는 수선화이기를...

▲ 사진 : 최진만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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