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레도 미-레도 레미파미...
  늦은 밤에 딸이 피아노를 칩니다. 고요한 시간이라서 유독 크게 들리네요. 뚱땅거리며 연습하는 바이엘 수준이지만 엄마귀엔 하나도 거슬리지가 않지요. 피아노를 배우던 제 어린 시절이 가깝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바깥의 나무들도 피아노 소리에 맞춰서 몸을 흔들지 않을까 싶어지는데요.

  교실 아래 혼자 있을 할미꽃이 눈앞에 떠올라요. 그러겠지요. 음악시간이면 할미꽃도 아이들 노랫소리에 고개를 끄덕이실 거예요. 어떤 시간을 제일 흐뭇해하실까요. 개구쟁이들이 떠드는 쉬는 시간이 아닐까 싶어져 슬그머니 웃음이 나네요.

  저는 요즘 매일 아침 초등학교에 간답니다. 막내딸, 무지개와 함께요. 무지개가 비만의 조짐이 보여 온 가족이 비상이거든요. 오빠들이 볼 때마다 성화를 대서 딸은 울상입니다. 저녁마다 몸무게를 재서 비교하고, 밤늦게 야식은 온 가족이 조심하지만, 어디 쉬운 일이어야 말이지요. 그래서 스쿨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니기로 계획을 세웠답니다.

  학교 가는 길은 작은 야산을 지나가는데 온갖 봄꽃들이 피어있어요. 함께 이름 맞추기를 하며 만나는 꽃들을 헤아려보니 이십 여종이 넘습니다. 아, 정말 봄이에요. 헤세는 봄이 이렇게 말한다고 했지요. '기뻐해라, 새싹을 내밀라, 몸을 던지고 삶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정말, 소나무 숲에 갇혀있는 목련도 기어이 꽃을 피워 밝은 미소를 건네요.

  아직도 아침은 서늘하네요. 이상기온을 보이는 요즘 우리나라 날씨를 보면 좀 걱정스럽지요. 앞집 아주머니도 상추가 크지 않는다고 말해요. 솎아다가 겉절이를 해먹을 땐데 어림도 없다고요. 우리의 뚜렷한 사계절이 아열대 기후로 변하고 있으니, 앞으로 일교차가 심한 사막화가 오는 것은 아닐까요. 계절이 바뀌면 옷장을 정리를 하곤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를 못 느끼겠어요. 밤에 외출할 땐 아직도 패딩 잠바를 걸치게 되는 걸요.

  손을 잡고 걷다보니 꾸중할 일도 언성이 낮아지고 딸아이에게 귀 기울이게 되더군요. 그 녀석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는 듯해요. 요즘 제일 큰 고민은 옆집 용준이가 서울로 이사 가는 일이군요. 어쩌다 제가 남자친구라고 말하면 그냥 친구지 남자 친구는 아니야 하고 정색을 했었지만, 툭하면 싸우긴 해도 날마다 붙어 다녔는걸요.

  학교 정문에 이르면 교실로 들어가는 현관까지 가자고 제 손을 잡아끕니다. 교실 앞 화단에 할미꽃이 한포기 심어져있어요. 누구의 손길일까요. 아마 아이들에게 할미꽃을 가르쳐주려고 일부러 심어 놓은 듯해요. 실하게 포기가 차서 꽃송이가 오십 여개 달려있습니다. 딸은 꽃이 예쁘지 않아서 맘에 안 든다고 하네요.

  같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자세히 들여다보았어요. 솜털의 안쪽에는 진한 자주색 꽃잎이 있고 그 안에는 노란 수술이 가득 차 있어 신비하게 느껴져요. 늙지 않은 젊음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보물을 품고 있어서 꽃잎을 활짝 안 여는가 봐요.

  할미꽃은 마치 허리가 많이 굽으셨던 우리할머니처럼 땅을 바라보고 피어요. 하늘 한 번 바라보지 못하고 오래 기도하는 것 같아요. 흰털로 덮인 열매가 할머니의 흰 머리카락 같아서 할미꽃이 되었다지요. 응석을 무조건 받아주셨던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가슴이 싸해요.

  딸에게 엄마가 할미꽃을 좋아했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릴 적에 산에 있던 할미꽃을 떠다가 내 울타리 안에 두려고 애써 본적이 있다고요. 물도 주고 신문지 고깔도 씌워보았지만 소용없었지요. 다 제자리가 있는 것이려니 어렴풋이 눈치 챘던 것 같아요.

  오늘도 할미꽃 앞에서 걸음을 멈췄어요. 딸이 말하네요.
  '속마음이 더 예쁘지, 엄마.'

▲ 할미꽃 사진-최진만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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