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신비해요. 그 요염한 모습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어요. 잎은 흔적도 없는데, 연둣빛 꽃대만 쑤욱 올라와 붉은 꽃을 피워요. 여린 듯하면서도 농익은 자태에 그만 홀딱 반해버렸어요.

  그런데 꼿꼿이 가눈 자세에서 고독감이 어려 있는 게 느껴져요. 스스로의 존재감을 알고 있는 듯 기품이 있지만, 부러 씩씩하게 구는 것 아닐까요. 꽃 밖으로 길게 나온 수술을 둥글게 깔고, 갈래 꽃잎이 어우러져 이룬 문양을 좀 보세요. 사연이 깃든 듯 절절하잖아요. 지금 그 사람이 곁에 있다면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하는 듯하지 않나요?

  이 꽃의 식물학 등록명은 석산이고 수선화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랍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꽃무릇이라고 부르니 순우리말이기도 하고 잘 된 일 같아요. 그런데 잎과 꽃이 함께 달리는 일이 절대 없어 상사화란 이름도 듣습니다. 하지만 실제 '상사화'라는 이름의 꽃은 따로 있으니, 상사화속(屬)이나 상사화류(類)로 불러야 맞겠지요.

  잎은 시월에 돋았다가 한 다발씩 뭉쳐져 겨울을 지내고, 다음해 오월이 되면 차차 시들어 사라집니다. 그리고 구월이 되어서야 꽃대만 솟아나서 꽃대머리에 산형꽃차례로 너 댓 개의 붉은 꽃이 커다랗게 피어요. 그래도 분명, 잎이 있었기에 꽃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불볕더위와 우렛소리를 지날 때 어디 있었냐고 묻는다면 가슴 깊이 있었다고 답하면 될까요.

  늘 서로 그리워하지만 만날 수 없으니 꽃말이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식물의 잎은 자신보다는 나중에 자랄 꽃눈을 위해 일생을 바치지요. 잎의 숭고한 노력 덕분에 꽃은 화려하게 피어 맘껏 뽐낼 수 있게 되고요. 그런데 혼신을 다해 피운 꽃을 볼 수도 없다니요.

  그렇게 자신을 완전히 버릴 수 있는 사랑이 인간에게도 가능할까요? 꽃무릇의 또 다른 꽃말은 '참사랑'이랍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참사랑이라니, 아이러니하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져요. 자식에 대한 부모의 무한한 사랑처럼, 사람 간에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지를 말하려는 것 같아서요.

  선명하게 붉은 색은 그리움에 찢긴 가슴일까요. 갈래갈래 갈라진 꽃잎이 한숨처럼 서럽더이다. 그 모습을 잊지 못하여 꽃무릇을 기다리며 구월을 살아요. 해마다 꽃무릇을 보러 선운산에 가야 했지요.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미리 갔다가 허탕을 치기도 했고요. 늦어버린 걸음이 안타까워 발을 구르기도 했어요.

  비껴가는 만남이 아쉬웠는데 올핸 곁에 있는 성산공원이랑 수변공원에서도 만났어요. 비탈에 무리지어 핀, 소나무 아래 피어 함께 그림이 된 꽃무릇! 참으로 아름다웠지요. 막 피어난 모습이 새벽 같고, 볼이 붉은 새색시 같았어요, 깨끗하고 싱그러운 자태가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가슴이 벅차서 품에 다 안아지지 않더군요. 달빛을 손바닥에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요.

  해마다 피고 저무는 저 꽃이 내 생의 잔잔한 일상을 출렁이게 하듯, 나 또한 누군가의 팍팍한 삶에 빨간 꽃이고 싶습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인 꽃처럼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싶어요. 인생의 소중한 것은 찰나에, 빛의 속도로 사라지더이다.

  그래요, 어디 사는 게 별건가요? 정신없이 마구 달려가다 주위를 둘러보면 허망해지는 게 인생살이 아니던가요? 여정이 중요한 게지요. 지금 살고 있는 여기. 그날이 그날 같은 보잘 것없는 일상이지만 곁에 있는 이들을 눈맞춰주고 보듬어주고 그럴 일입니다. 먼 것, 만날 수 없는 것만 그리다가 삶을 허비하지 말고요.

  두드러지게 밝고 곱던 꽃무릇도 지금은 지고 없어요. 인간을 품어주던 자연도 이제는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 합니다. 겨울이 오고 있다는 신호지요.

  처연한 계절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당신 곁에 있어요.

▲ 사진 박영희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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