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가을이에요. 억새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봅니다. 햇살을 받을 때는 아름답게 빛나지만, 석양엔 얼마나 허허로운 모습인지요. 아마 우리 인생도 이때쯤에 도달했겠지요. 자식들이 자라서 어느새 우리가 연애하던 나이가 되었으니, 삶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부쩍 드네요.

  하지만 저는 지금 이 나이가 좋습니다. 더 이상 여자가 아니고 친구 같다고, 당신은 심심해진 우리 관계를 아쉬워 하지만, 저는 합일 되어가는 게 느껴지는 걸요. 이제야 일심동체를 이루었다고나 할까요.

  자다가 깨어, 당신이 곁에 누워있는 것을 느끼면, 얼마나 마음이 놓이고 평안한지요. 부부의 금슬이 좋음을 뜻하는 자귀나무가, 밤이 되면 새의 깃처럼 생긴 작은 잎들이 서로 맞접고 붙어서 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요. 당신 가슴으로 파고들면 잠결에도 안아주며 토닥여주는 손길, 그렇게, 당신하고 붙어있는 시간이 좋아서 아침마다 일어나기 싫어 꾸물댄답니다.

  늘 제 말에 귀 기울여 주는 당신, 고마워요. 근심거리가 생겨도, 당신한테 말해야지 생각하면 안심이 돼요. 고개를 끄덕여주고 동조해주면, 화가 다 가라앉고 서운한 마음이 녹아버리지요. 젊었을 적엔 그러니까 결론이 뭔데, 요점만 말해, 하면서 성급하게 굴었던 것, 혹시 기억하는가요?

  어쩌면 우리는 나이 들면서 더 잘 맞아가네요. 집안일은 남 같았던 당신이, 지금은 청소를 도맡아주고, 요리도 옆에서 거들어 주니 참으로 즐겁고 신이 납니다. 소탈해서 아무것이나 맛있게 먹어주는 당신을 위해, 뭘 더 만들어볼까 궁리하게 되지요. 귓밥을 파주고, 봉숭아 꽃물을 들여 주는 당신은 잔정이 많은 사람이에요.

  당신의 사랑을 통해 해방의 기쁨을 얻었어요. 이젠 밤을 새고 들어와도 걱정되지 않아요.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믿고 따라가요. 차를 타고 가다가 곧잘 제 손을 잡아주는 당신으로 인해 생이 따스해집니다. 제 건강을 위해 바쁜 중에도 산에 가자고 하고, 저에게 보폭에 맞춰주시는, 당신은 그런 분이지요.

  같이 손잡고 건너온 세월이 꿈같아요. 당신이 없었다면 그 춥던 날들을 어찌 견뎠을까요? 당신처럼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 어디 흔한가요? 자식들에게 최선을 다한 아버지였고, 저에게 다정한 남편이었어요. 생각나세요? 대형 교통사고로 제가 의식도 잃고 병원에 두 달 이상 누워 있었을 때, 당신은 사업도 접고 제 곁에 있어 줬잖아요. 평생 갚으며 살아야지 했었는데요.

  우린, 자연에 대한 다큐를 찾아보는데 재미를 붙였지요. 하늘에서 본 지구, 빙하가 녹아서 만든 폭포소리, 탄성을 지르며 공감하면서요. '우리 저기 꼭 가보자' 이야기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못가면 또 어때요. 이렇게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으니. 숨겨진 듯, 어딘가에 산이 품고 있는 호수, 울창한 정글 속의 계곡,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돼요. 당신의 깊은 가슴처럼.

  우리 사랑의 완성은 당신의 지혜의 산물이며 노력의 결실임을 알아요. 제가 잘나거나 사랑받을만해서가 아니지요. 당신에게서 큰 사랑을 배웠어요. 흰머리가 더 많은 당신 모습이지만 여전히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거 아세요? 우리가 함께 갈 남은 시간, 그 길이를 짐작할 순 없으나, 주어진 오늘, 온전히 뜨겁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읽고 있는 고 이중섭화가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해서 마무리 할게요
 '나의 상냥한 사람이여, 나만의 소중하고, 나의 가장 큰 기쁨인 당신, 언제나 당신만을 가슴에 가득 채우고 살아가오. 마음 밝게 건강하여 주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뜨겁고 긴 포옹과 뽀뽀를 보내오.'

▲ 사진 : 최진만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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