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혹시 그 때 그 녀석 발자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지난 번 눈이 많이 내렸을 때 산비탈에 있는 밭에서 그 녀석을 본 적이 있거든요. 처음에는 개가 돌아다니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고라니였어요. 깊은 산중에나 살고 있을 고라니가 이런 야산에도 있을 리가, 제 눈을 의심했지요.

  그런데 쫑긋한 귀와 긴 목이며, 둥근 몸체가 분명 고라니였어요. 눈이 온 세상을 덮어버리자 길을 잃고 산에서 내려온 것이지요. 딸아이를 불러 알려줬더니, 같이 바라보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내 눈에만 보이네요. 알고 있는 녀석이니까요. 지리산에서 만난 적이 있지요.

  점심시간에 마을 둘레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럿이 함께 걸을 만한 노선을 이리 저리 찾아보다가, 사십여 분 소요되는 적당한 코스를 만났지요. 마침 편백나무 숲정이가 있거든요.  피톤치드가 많은 숲에 들어서면 맨손체조도 하고 노래도 불러요. 가슴이 시원해지지요.

  오늘은 눈이 많이 내려서인지 아무도 안 나왔네요. 그래서 혼자 걷기로 했습니다. 굴다리를 지나 흙길로 접어들면 발이 먼저 좋아하지요. 눈까지 쌓여 푹신한 길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네요.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 벌판이 너무 정갈해서, 선뜻 발자국을 내기가 미안할 정도예요. 눈이 쌓인 보리밭에 벌렁 누워 눈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얼른 모른척 합니다.

  편백나무숲정이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길을 가로지른 다른 발자국을 만났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네발짐승이군요. 그래서 지난번에 보았던 고라니가 생각난 것이지요. 산속으로 들어간 발자국을 눈으로 따라가 봅니다. 그 녀석, 잘 지내고 있을까요?

  눈 쌓인 편백나무 숲은 선경입니다. 나무마다 하얀 꽃을 피우고 가지런히 도열해 있습니다. 화려한 꽃을 볼 수 없는 나무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동화의 나라에 들어선 것처럼 기분이 들뜨네요. 두 팔을 벌리고 한 바퀴 돌아봅니다.

  문득 나무위의 눈이 어머니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구름이 끼면 내려와 덮어주고, 해가 나오면 사그라져 햇살을 받게 하는 폼이, 꼭 나무의 어머니 같지 않나요? 내 어머니께 이 광경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같이 올 수 없습니다. 건강이 안 좋으셔서 손잡고 부축해도, 집안에서만 거동하실 수 있을 정도시니...

  어머니의 삶은 곤고하셨지요. 시부모님을 모시고 다섯 자녀를 키우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더구나 늦게 공부를 시작하신 아버지까지, 농사를 지어 뒷바라지 하셨으니 허리 펴실 날 없으셨습니다. 그런 형편에 고단한 몸을 뉘일 시간도 모자랐지요.

  다만 어머니에게 숨돌릴만한 굴뚝이 있었다면, 그곳은 교회였어요. 그곳에 갈 때만큼은 흰 고무신을 짚수세미로 닦아 신으시고, 가장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셨지요. 따라가서 옆에 앉아 있다가, 어머니의 노랫소리를 들었어요. 얼마나 목청이 크던지, 정말 내 엄마가 맞는지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볼 정도였다니까요. 

  평소에 조용조용한 목소리셨는데요. 앞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는 평범한 어머니는 두 눈을 감은 채 찬송가 속에 푹 빠져 계시더군요. 그때 어머니는 참 평안해 보였어요. 그래, 노래가 어머니의 쉴 곳이구나. 그렇지만 작은 시골 교회의 천장까지 울려서, 처음엔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답니다. 마치 외치는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지금, 내 어머니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지 못하십니다. 중풍으로 쓰러지신 뒤 발음이 어둔해지셨어요. 온 힘을 쏟아 붓는 듯했던 그 음성이 이리도 그리운데요.

  어머니, 눈이 오면 또 가슴에 모시고 올게요.

▲ 사진:최진만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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