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해졌는데 밖에서 누가 찾습니다. 나가 보니 석동할머니께서 김장김치를 가져왔네요. 며칠 전부터 배추 따서 간 치고, 씻고, 분주하더니, 드디어 오늘 버무리셨나 봐요. 관절이 안 좋은 할머니에게는 몹시 힘에 부친 일이었을 것인데요. 

  배추 이백 포기를 담아 다섯 집이 나누었다고 하시네요. 아이고, 우리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김장을 해주느라 허리가 휩니다. 누가 말린다고 들으실 것도 아니고, 자식을 향한 어미의 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화가 나요.

  혹, 몸살이 나지 않으셨을까요? 아니, 분명히 그러셨을 테지요. 온 몸이 쑤시고 아픈 것은, 몸이 살려고 나름 표현하는 것이요. 너무 무리하고 있으니 그만 쉬어야 할 때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나요. 살고 싶은 것은 본능이니까요. 몸이 아프면 영혼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다 귀찮고 성가시지요. 마음도 연해져서 괜히 서럽고 눈물 나고 그러잖아요.

  무거운 통을 내려놓고 돌아가는 석동할머니 등을 달빛이 안아주네요. 따독따독 쓰다듬어주며 글썽여주네요. 어느새 중천에 떠올라서 말이에요. 오늘따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별이 빨리 돌았는지 금세 어두워졌어요. 하긴 추운 겨울이 오면 지구도 밤엔 천천히 도는 것 같지 않나요. 매섭게 꽁꽁 얼어붙은 한파에서 시달린 몸을 좀 더 녹이라고요. 낮 동안 척추를 곧추세웠던 산 능선도 비스듬히 눕히고 달빛이 어루만져주네요.

  저는 달을 좋아합니다. 세상일에 자주 치어서 그럴까요?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위안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이토록 이슥한 시간, 세상 어느 불빛보다 달빛은 따스하네요.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태양빛을 반사하면서도 온 세상을 다 스밉니다.

  오늘은 낮부터 저와 함께 다녔답니다. 산길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저 녀석과 눈이 마주쳤지요. 나, 여기 있어 하고 아는 척을 하더군요. 오늘이 음력 초여드레, 한낮에 동쪽 하늘에서 떠올랐네요. 아래로 둥근 상현달이어요. 그래, 네가 거기 있다는 거 알아. 보이지 않아도 알아. 넌 이 별을 놓지 못하고 늘 주변을 맴돌고 있잖아. 내내 따라오는 반달과 내통했지요.  

 
  달을 보면 아련해집니다. 남루한 삶을 붙잡고 안간힘쓰는 나를 내려다보며, 사랑하기도 모자란 세월이라고 속삭여주는 듯해요. 그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순 없지만, 상처의 덧난 자리를 부드럽게 입맞춰주는 온기가 느껴지는걸요. 그래요, 달을 보면서 가슴에서 꺼내볼 누군가가 없다면, 당신은 퍽이나 가난한 사람입니다. 추억을 새로 만드는 일보다, 지나간 것을 되새기는 일이 더 많은 나이가 아직 아니라면 모를까, 달은 그리움이거든요. 유년의 뜰도 함께 했으니까요.

  배추꼬랑지가 그렇지요. 그 속엔 어린 시절이 들어 있어요. 예전의 배추뿌리는 단단하면서도 아삭하여 참 맛있었어요. 단맛과 약간 매운맛이 어우러져 개운하게 씹히는 맛이 질리지 않았어요. 감기기운이 있으면 할머니는 배추꼬랑잇국을 끓여주셨지요. 그 국을 먹고 뜨듯한 아랫목에서 한숨자고 나면 한결 몸이 가벼워지곤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그때의 맛이 나질 않네요. 사람이 필요한 부분만 지나치게 개량시킨 것이지요. 하여, 배추의 지상부는 지나치게 왕성하고 뿌리는 버려지고 있지요. 배추꼬랑이를 먹으려면 뿌리 전용 종자를 심어야 한다네요. 배추를 길러내느라,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진을 다 빼고 있는 배추꼬랑이가, 어쩐지 밤을 지키는 달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밤엔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당신을 위해 만월을 띄울게요. 보이세요? 미소 지어진 당신 얼굴이 떠오르는군요.

소선녀  수필가 / 상정보건진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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