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변산바람꽃

  이른 봄에 개화하는 변산바람꽃은 봄바람을 몰고 오는 야생화입니다. 꽃대 하나에 꽃 하나 피우지요. 그 가녀린 꽃대가 잔설을 뚫고 솟아나 봄을 알리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습니다.

  봄을 기다리셨지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춥고 스산한 우리네 삶도 봄 햇살처럼 따스해지지 않을까요. 언 땅이 녹는 것처럼 굳은 마음도 헐거워지겠지요. 고집대로 살려다가 그것이 맘대로 안 되어 생긴 미움, 원망으로 딱딱해진 우리 가슴이, 푹신하게 풀어지기를 기대하며 봄을 마중합니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면서 부음을 자주 듣게 되네요. 엊그제는 마을의 젊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길이나 함께 있어주자고 늦게까지 장례식장에 앉아있었습니다. 암으로 투병하면서 여러 번 위기를 넘겼기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 할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허망한 마음이 쉬이 가시지 않더군요.

  그 자리에서 이장님이 며칠 전에 톡톡히 망신당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라고 하시대요. 회사에 다니는 며느리가 부탁해서, 유치원으로 손자를 데리러 가셨답니다. 그날따라 점심모임에서 소주를 한두 잔 곁들였는데, 얼굴에 붉은 기운이 남아있었대요. 그랬더니 유치원 선생님이 절대로 아이를 내줄 수가 없다며 거절하더랍니다. 많이 안마셨고 이제 다 깼으니 염려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지요. 다만, 대리운전을 부르면 손자를 데려갈 수 있다고 하더랍니다.

  어찌나 창피하던지 포기하고 그냥 돌아오셨다지요. 새파란 처자에게 체면을 잃다니, 이런 일은 생전 처음 당하지 않았는가, 참으로 무안해서 그날 밤에 잠도 안 왔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가르침이란 본디 옳고 그름을 깨닫게 하는 일이니, 규칙을 잘 지키는 그 선생님이 참으로 믿음직스럽더래요. 그래서 이틀 후에 과일을 들고 찾아가셨다지요.

  저절로 양육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사랑은 아무리 많이 줘도 넘치는 법이 없고 탈이 없고, 끝없이 가슴에 쌓아지는 것이니, 아이가 큰마음을 지니게 된다고요. 사람이란 조잔한 동물이라서 뭔가를 많이 가지면 오만해지는데, 사랑만큼은 그러하지 않은 거라는 이장님의 말씀이었지요. 오늘 하늘나라로 가시는 양반이, 아직 더 살아야하는 저에게 큰 교훈을 주시는구나,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렇지요. 사람은 사랑이 충만해야 합니다. 사랑은 남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랄 때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할 때 빛이 납니다. 남에게 알리거나 자랑하기 위함이 아닌, 남을 닮으려고 안달하지 않는, 자존심을 지닌 것이지요.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서로 다른 다양한 모습들이 조화를 이룬 것이니까요.

  부모는 아이를 낳는데 그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사랑의 영양분을 줍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기준도 없이 응석을 무조건적으로 다 받아주면 즉흥적인 사람이 됩니다. 감정을 따라 사는 것은 배에 노가 없이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는 것과 같지요. 뜻과 관계없이 아무데로나 흘러가면서 자유롭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푯대를 향해서 혼자 헤엄쳐 바다로 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어른들이 할 일 아닐까요? 온실에서 모든 필요를 갖춰주면 자립하지 못하니까요. 만물을 이끌고 다스리는 인간에게 우선순위 덕목은 굳은 의지입니다. 스스로 혼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존재의 기쁨입니다.

  작금, 순서도 없이 봄꽃들이 와르르 피고 있는 것도, 질서를 잃어버린 인간들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요.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저작권자 © 김제시민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