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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감 말랭이

  '뽀뽀하고 싶어, 지금'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겠지. 그래도 내 맘이 그런걸. 억새밭 사잇길을 단둘이 걷고 있잖아.

  감동스런 순간엔 더욱 그랬지,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분수의 물기둥을 함께 볼 때, 밤하늘에서 폭죽의 불꽃이 쏟아져 내릴 때, 붉게 타오르는 단풍나무 앞에 서있을 때... 점잖은 당신은 그저 잡고 있던 내 손을 꼭 쥐어주는 것으로 대신하지만, 난 당신 입술을 자꾸 훔쳐보게 되네.
 
  당신은 홍시를 참 좋아하지. 툇마루에 늘어놓은 홍시를 만져보러 나가는 재미가 쏠쏠해. 몰랑해진 것을 골라서 식탁에 들여놓으면서, 맛있게 먹을 당신을 생각하지. 감나무 아래에 깻묵을 부어놓으면 해거리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도, 내버려 두고 있으니, 우리 집 홍시나무는 올해도 드문드문 열었네. 까치는 어쩜 그리도 잘 알고, 익은 것만 한 귀퉁이씩 쪼아 먹곤 하는지. 그녀석이 입댄 것은 진짜 맛있어, 그렇지? 익는 족족 따먹다보면 겨우살이로 남겨둘 게 없어. 그래도 올해는 감복이 많은가봐. 이집 저집에서 나눠주셨네.

  단감은 깎아서 감 말랭이를 만들어 봤어. 곶감 만들 엄두는 못 내고, 대충 네 조각을 내서 씨를 발라내고 말려본 거지. 어릴 적에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고구마말랭이가 생각나. 일주일 정도 말리니 물기가 빠지면서 꾸들꾸들해졌네. 요 진득한 맛을 요즘 젊은것들이 알려나.

  어느덧 한해가 저물어 끈끈한 정이 들러붙는 듯한, 감을 맛보네. 추워지는데 벼를 베고 난 논바닥이 연초록이 되었어. 밑동마다 새순을 낸 게지. 저것들 서리를 맞으면 버티지 못하고 금새 스러져버릴 걸, 무슨 허튼 짓 인고, 그러면서도 그 열기가 전해져서 가슴속을 들여다보게 돼. 품어보지도 못하고 팽개쳐놓은 씨알이 저 구석진 곳에 있어. 그 꿈을 다시 만지작거리게 되네. 이젠 늦지 않았을까.
 
  세밑이 다가오니 마음의 빗장이 헐거워지나 봐. 나이 들어서야, 그렇게 듣기 싫어라 했던 뽕짝도 들어오고, 촌스러워서 쳐다보지도 않았던 진달래색도 좋아지고, 곰삭은 맛도 알게 된 것처럼.

  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어렴풋이 보여. 부질없이 헛짚기도 하고, 헛짚이기도 해서 억울했던 일들이 생각나. 그 당시엔 가슴을 쥐어뜯는 아픔에 시달렸는데, 지나고 보니 가물가물 희미하군. 이만큼 살아보니, 헛물켜는 일도 그리 무섭진 않아. 나에게 헛일이 된 것이 누군가를 위한 일이기도 했고, 좋은 일이 나쁜 일을 불러오기도 했고 나쁜 일 때문에 좋은 일이 생기기도 했으니. 헛것들이 삶이었네그려.

  생을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까 십이월은 연습 없는 인생에 허락된, 종착역이 있다고 알려주는, 작은 기회인 게야. 마무리하고 떠나야할 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이. 살아보니, 자신이 고요하면 주변이 잠잠해지더군. 중심을 잡고 있으면,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아도 돼. 안정을 주는 가족의 경험이 더 없이 소중하고, 당신의 다정함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네.

  묻지 않고, 그냥 뽀뽀해버리지 뭐. 당신이 되게 좋아.

사진: 나인권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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