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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소선녀의 푸나무들의 노래64. 물양귀비

  꽃이 피기를 기다립니다. 언제쯤 꽃대가 올라올까, 자주 들여다봅니다. 작년에도 수련을 길렀었는데, 끝내 꽃을 보지 못했거든요. 이 녀석도 그럴까봐, 마음 쓰입니다.

  널벅지에 담아 현관 앞에 놓고, 드나들 때마다 눈여겨 바라봤지요. 어, 드디어 꽃봉이 하나 수면위로 고개를 내밀었네요. 그런데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지더니, 녀석이 보이지 않아요. 사나운 빗줄기에 그만, 밀어 올릴 힘을 잃었나 봐요. 물속에 잠겨버린 녀석이 안쓰럽습니다. 대신, 새로 고개를 내민 녀석이 쑤욱 올라오더니, 꽃망울을 열려고 하는군요. 해가 뜨면 곧 피겠어요. 고양이가 와서 물을 핥으며 꽃대를 건드립니다.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본 적이 있으신지요? 연두색 꽃받침이 벌어지고 꽃잎이 살짝 보일 때, 가슴이 막 두근거려요. 물양귀비는 꽃잎이 석장인데요. 병아리 색 연노랑이 부드럽고 감미롭지요. 유약한 것 같으면서도, 단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고요. 헤 벌어지지 않고, 살짝 오므린 모습이 수줍어 보여요. 상기된 새색시처럼 은근하고요. 좀 더 열리니, 진노랑 바탕과 붉은 수술이 보이네요. 쪼끄만 꽃 한 송이가 주변을 환하게 밝힙니다.

  하지만요, 딱 하루뿐이군요. 한낮의 영화도 잠시, 오후가 되니 꽃잎을 닫습니다. 아침나절의 짱짱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어요. 참 허망하지요. 그리도 여리고 곱더니, 기운을 잃었네요. 하, 짧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저녁나절에 와있지 말입니다. 꽃 같은 시절이 있었던가, 훌쩍 지나온 세월이 보이네요.

  꽃대가 수면위로 보이면, 다음날 아침에 꽃을 피웁니다. 이른 새벽, 오늘 필 녀석을 살펴보고 있는데, 차가 한 대 들어와요. 비 소식에, 들깨 모종을 서두르느라 몸살이 났다고, 진료를 받으러 오셨대요.

  이상하지요. 다른 때 같으면, 시간을 지키시라는 둥, 없으면 어쩌려고 쉬는 날 오셨냐는 둥, 구시렁댔을 텐데요. 그냥 물양귀비 꽃처럼 웃었네요. 이 꽃봉오리 좀 보세요, 그랬네요. 그분도, '소장님은 언제 봐도 낯꽃이 좋아서 고맙다', 그리 말씀하시네요. 그러게요. 물양귀비 꽃말이 깨끗한 마음이라서, 닮아졌을까요.

  그렇게 한 달 여, 날마다 한두 송이씩 꽃을 피우더니, 어느새 녀석이 잠잠해졌어요. 윤기가 자르르하던 둥글둥글한 잎도 어쩐지 시들합니다. 장마에도, 폭염에도, 끄떡없이 포기를 늘리며 씩씩하더니, 후줄근해요. 올해는 더 이상 꽃을 보기 어렵겠지요. 좋은 시절이 가버린 게죠. 가위, 덧없군요.

  벌써, 그 어여쁘던 자태가 가물가물 희미해요. 더 자주 눈 맞추고 그럴 걸 그랬지요. 누런 잎도 따주고 물도 갈아주고 물풀도 넣어주고 그랬는데요. 더 함께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군요. 가버린 뒤에 후회하면 뭐해요. 아무 소용없는 짓인걸요.

  한낮도 가고, 애틋하던 정분도 갔네요.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걸요. 삶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고 지금, 여기지요. 행복을 목적지로 여기고, 뒤를 쫏는 것은 어리석어요. 플로베르 시처럼, 생은 아름답다고 죽도록 말하려고 물양귀비꽃은 피었다 졌어요. 그리고 다시, 갸륵하게 피어 춤추는 꽃들의 축가에 귀를 기울여요. 육신을 벗을 날까지, 꽃을 봅니다. 생명(生命)은 명령이니까요.

  뜰에 봉숭아꽃이 피었어요, 물양귀비꽃은 가고요.

사진: 나인권

 

김제시민의신문  webmaster@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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