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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소선녀의 푸나무들의 노래67. 국화

 

소선녀수필가/상정보건진료소장

 바람이 그냥 지나간다.

  국화를 슬쩍 쓰다듬고, 앞산 등성이를 살랑 넘어간다. 잠깐 반갑게 아는 척을 해도 좋으련만, 한눈을 팔아도 좋으련만, 뒤도 안돌아보고 가는구나. 언제나 가을을 맞아하는 건 건조해지는 손이었는데, 올해는 눈도 끼어들었다. 뻑뻑하고 부셔서 눈뜨기 힘들다. 컴퓨터하고 하루 종일 붙어있는데 어쩐담. 인공눈물을 처방 받아야하나.

  눈이 나빠진지는 꽤 되었다. 돋보기를 써야 책을 읽으면서도, 노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웃긴다. 교육이나 회의 자료를 볼 때마다, 이런 눈을 안 가져왔네, 하게 되니, 원. 나이가 들면서 시력이 나빠지는 것은, 적당히 눈감고 살라고 그런다는데, 너무 지나치게 살펴보고 상관하고 그래서 그러는가보다. 바람처럼, 주춤거리지 말고 그냥 지나가야 하는데.

  이렇게 움츠러져 스산한 요즘, 뜻밖에 즐거운 일이 생겼다. 아침마다 잘생긴 남자에게서, 그윽한 향을 가진 노란국화를 선물 받는 것이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다니. 두 살도 채 안된 사내아이가 국화를 꺾어달라고 할머니를 졸라서, 보건진료소로 가져온다. 마음이 활짝 개이고 눈가가 촉촉해진다. 잘될 녀석 같으니라고.

  막 걸어 다니고 말을 배우기 시작한 그 녀석은, 무조건 열어보고 꺼내본다. 할머니는 위험할까봐, 폐가 될까봐 안 돼, 하고 말리기 바쁘다. 정수기 아래 탁자 속에는 자질구레한 용품들이 많이 들어있는데, 녀석은 그곳을 궁금해 한다. 할머니는 꾀를 내서 손잡이 두 개를 끈으로 묶어 놓았다. 몇 번 잡아당겨 보고는 포기해버렸다. 맘껏 저 속을 휘젓도록 해주고 싶은데.

  이제 며칠만 지나면, 동생을 낳고 산후조리가 끝나는 엄마를 따라 자기 집으로 돌아간단다. 어쩌나, 저 새순 같은 보들보들한 뺨에 볼을 대보는 기쁨이 없어지는 것이다. 저 생명이 샘솟는 웃음소리가 적막해지는 것이다.

  가기 전에 녀석을 신나게 해주고 싶다. 그래, 저 탁자를 열어주자. 그 속에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무엇을 넣어놓으면 좋을까? 녀석이 좋아하는 고양이를 넣어 놓을까, 아니지 그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아, 깜짝 파티엔 역시 풍선이 최고지. 여러 모양과 색깔의 풍선을 불어서 가득 넣어두자.

  탁자 속에 풍선을 감춰놓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는 소리가 나는지 계속 귀를 기울인다. 드디어 왔다. 탁자 손잡이의 끈을 풀어주자, 잽싸게 문을 연다.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함박웃음을 짓는다. 헬륨가스를 넣어 놓은 풍선은 순식간에 나와서, 천정으로 올라가 버렸다. 발을 동동대는 녀석을 안아서 풍선을 잡으러 다닌다.

  아, 지금 이 순간이다. 어느새 흘러가버린 생을 보라. 흩어져버리기 전에, 지나가버리기 전에 사랑한다고 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을게, 이것은 아니다. '내 영혼이 이를 수 있는 깊이와 폭과 높이 그 너머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금, 가슴 터지도록, 자유로이...'

  겨울이 가까운 요즘, 자꾸 돌아봐진다, 잎을 다 떨어뜨리고 내면으로 고부라지는 나무들처럼, 생각이 자꾸 잦아든다. 가버린 사람, 가버린 시절, 아쉽지만, 여기까지 온 은총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단풍잎이 여린 새순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물들여 지금, 가장 아름답듯 그렇게 조금씩 깊어져 와서. 지금이 제일 좋다.

  오늘은 녀석이 안 오네. 풍선 배달 갈까?

사진: 나인권

김제시민의신문  webmaster@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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