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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상, 김제군수 정담

 

지난 여름 8월 31일 진안군 부귀면 주민들과 진안지역 사회단체인 ‘웅치 전적지 보존회(이사장 손석기)’ 주관으로 부귀면 소재 창렬사에서 「웅치전 추모제」가 엄숙하고 경건하게 거행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진안군수(권한대행), 군의회 의장, 각급 기관단체장, 전북일보 사장(윤석정)은 물론 멀리 경북 영양군 향교 전교(정재홍)를 비롯한 정담 김제군수의 후손 10여명이 참석해 어느때 보다도 추모제 행사 열기가 더해졌다.

 

  웅치는 지금의 진안군 부귀면과 완주군 소양면의 경계 주변에 있는 험난한 고갯길이다. 이 고갯길을 넘으면 손쉽게 전주성을 장악할 수 있는 주요 요충지다. 임진왜란(1592) 당시 호남 곡창지대를 노린 왜적과 웅치에서 맞서다가 장렬하게 숨진 이 고장 선열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사가 당국의 무관심 때문에 4백여년간 지역주민들 만의 추모행사로 간소하게 지내오다가 근년에 와서야 차츰 웅치전의 역사적 평가가 새롭게 인식되면서 지역 관계당국에서도 관심을 갖게 되어 주민들의 많은 참여 속에 날로 알찬 행사로 발전하고 있어 퍽이나 고무적이다.

 

  웅치 전적지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3개월 후인 음력 7월7일~8일 이틀동안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왜군 별동부대장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1만여 대군을 맞아 김제군수 정담(鄭湛 : 1548~1592)이 이끈 1천여명의 관군이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거의다 전몰당한 역사적 혈전장이다.

 

  군량미 확보가 절실했던 왜군은 호남 곡창지대의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차지하고자 금산을 거쳐 쳐들어 왔으나 가파른 웅치(곰치재) 고개마루에서 정담장군의 관군에 막히고 만다. 이 치열한 전투로 비록 정담장군과 휘하 장졸 대부분이 장렬히 전사했으나 이들의 희생적 항전으로 왜군이 호남땅에 쉽게 발을 들여 놓을 수 없게 되었다.

 

  조선의 전체 역사(27대 임금, 518년 : 1392~1910)를 통털어 가장 무능하고 비열한 선조임금과 그를 둘러싼 제신들은 왜군이 부산포를 상륙한 지 불과 20여일 만에 한양을 향해 일사천리로 밀려오자 잔뜩 겁을 집어먹고 허겁지겁 종묘사직과 울부짖는 백성들을 내팽개친 채 의주까지 도망치기에 경황이 없었다.

 

  임금의 어가(御駕)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양도성을 야반도주하자 이에 흥분한 백성들이 경복궁에 방화하여 삽시간에 잿더미로 만들고 닥치는 대로 재물을 약탈했다. 전란으로 백성들이 도륙당하고 있는데도 제 살길 만을 찾아 달아나는 선조임금이나 비겁한 조정대신들의 추태를 목도한 민초들이 이성을 잃은채 방화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것은 당연한 인과응보라 할 수 있겠다.

 

  그나마 우국충정의 뜻있는 지방 선비들인 고경명, 곽재우, 김천일, 조헌 등의 의병장과 휴정, 유정 등 승병장들의 고군분투로 水,陸 양면으로 협공하려던 왜군의 진격을 곳곳에서 저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공적이 잘 알려진 분들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김제군수 정담장군의 웅치전 공적은 아예 묻혀버렸으나 도체찰사(군 최고사령관격)이며 영의정이었던 서애 류성룡이 남긴 징비록(懲毖錄)에서 겨우 한가닥 기록을 엿볼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싶다.

 

  정담장군은 본래 강원도 평해부(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출신으로 무과 별시에 급제(1583)하여 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하나인 용양위 부장으로 임명된 후 곧이어 경원판관을 제수받았으며 두만강 유역 4군 일대를 자주 침입한 니탕개(泥湯介)의 난 평정에 혁혁한 공을 세운 무장이다.

 

  조정에서도 정담장군의 공적을 인정하여 청주목사로 승진 내정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바람에 곡창지대인 호남지역 사수(死守)가 급선무인지라 부득이 김제군수로 임명하게 되었다. 이에 정담군수는 김제고을에 부임하자마자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펼 겨를도 없이 우선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 최우선 임을 십분 인식하고 1천여명의 관군과 함께 전라도 지역의 내륙 관문인 웅치전투에 임하게 된다.

 

  웅치전투는 김제 용지출신 의병장 황박장군이 이끈 제1진과 해남현감 변응정, 나주판관 이복남이 이끈 제2진이 차례로 무너지자 최후 보루로서 제3진을 이끈 김제군수 정담장군은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 무기의 열세와 장졸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끝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정담 장군의 국난극복을 위한 살신성인의 위훈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김제 유생 조사립(趙斯立)이 웅치전투 상황을 상세히 정리하여 해상 선박편을 이용, 선조임금이 머물고 있는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상계(上啓)되기에 이른다. 이에 도체찰사 류성룡의 천거로 병조참판의 벼슬을 추증받게 되었다.(1593.12)

 

  또한 김제 유생 라계(羅稧) 등 뜻있는 김제 선비들은 어지럽게 흩어진 웅치전투장 시체 무덤속에서 정담군수의 시신을 거두어 김제군 내 빈집에 가매장한 후 조석으로 친부모상 못지 않게 슬퍼하며 제문을 지어 올렸다. 그 제문 말미에 “鄭公이 아니었다면 호남이 왜적에 함락되어 우리가 어찌 魚肉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公은 가셨지만 혼령만은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의 제향을 흠향하소서”라고 축문에 담았다.

 

  영해부사 고용후(高用厚, 의병장 고경명의 아들)도 「嗚呼歲在 壬辰倭亂(아, 슬프도다 임진왜란)」의 축문에서 “김제군수 정담 公이 웅치전투에서 다른 장수는 먼저 도망쳤지만 화살이 다할 때까지 죽음으로써 왜적을 막아 전주성이 온전할 수 있었다”며 슬퍼했다.

 

  웅치전투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김제인 조성립(趙成立)도 웅치전투의 소회를 담은 대서사시 「비분탄(悲憤歎)」을 남겼으니 그 주요 줄거리만 잠시 읊어 보고자 한다. 조성립은 성균관 진사 출신으로 정담군수의 최측근 策士이다.

 

“아, 슬프다! 비분에 홀로 탄식하노라.

저 가파른 곰치마루 멀리서 바라다 보이네.

 

왜적 무리들 준동하여 세길로 이 땅을 짓 밟을 적에

한 부대 전라도로 넘나들어 곧장 전주성을 향해 진격하네.

 

동래성은 초장에 박살나고, 부산포도 함께 무너지니

왜군이 지나가는 곳이면 어느 고을이고 숨고 내빼기 바쁜데,

 

김제군수 정담(鄭湛) 장군은 자기 몸 생각않고 나라만 생각하여

한자루 칼을 들고 일어서 왜적의 예봉에 맞섰다오”

 

~ 이하 중간 생략 ~

 

“오늘날 우리 김제고을, 鄭公같은 충신이 맡아 있었으니

지금 곰치(웅치) 이곳이야 말로 1)수양성(睢陽城)이 곧 아닐런가.

 

鄭公의 이런 치적 어찌 상세하게 알렸던가!

곰치재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자들이 있어

김제고을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하였다네.

 

아, 슬프도다! 비분에 홀로 탄식하노라.

鄭公의 의로운 죽음, 천추에 남을 숭고한 죽음 이로다”

 

1) 수양성(睢陽城) : 중국 양자강 유역의 성으로 당나라 현종때 안록산의 난으로 함락되었으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장수가 죽음으로써 사수한 덕분에 3일만에 구원병이 와 전쟁의 승기를 잡을수 있었다는 성을 말함

 

  이처럼 웅치전투 제1진 의병장 황박과 김재민이 김제인이고, 정담장군의 공훈을 직접 상계한 조사립과 정장군의 시신을 거둔 라계 등 선비들이 모두 김제인이었으며, 정장군의 죽음을 비통하고 애절하게 읊은 「비분탄」 시문을 지은 조성립 역시 김제인이다. 뿐만 아니라 정담 장군이 가신지 백여년이 지난 후 숙종임금의 윤허(1690)로 세워진 정려각 음기(陰記)에 “鄭公이 김제군 내에 있는 병졸과 농민들을 징집하여 웅치전에 임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휘하 장졸 대부분이 김제지역인들로 편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그동안 김제지역 인사들 조차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관심이 적었다. 비록 적장이지만 왜군 별동부대장 고바야카와는 정담장군의 충성스러운 의기를 높이 기려 관군들의 시신을 모두 거두어 웅치전투 현장 길 옆 숲속에 합장하고 그 위에 애도의 비목(碑木)을 세워 “조선국의 충의로운 영혼을 삼가 애도하노라(弔朝鮮國忠肝義膽)”라고 넋을 위무했다.

 

  또한, 서애 류성룡은 “이리하여 그나마 전라도 지역만이 홀로 온전하였으니 어찌 높이 추앙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蓋嘉其力戰也由是全羅一道獨全)”라고 징비록에 기록하고 있다. 도원수인 권율장군도 자기가 주도한 행주산성 대첩보다 정담 김제군수가 이끈 웅치전투로 호남 곡창지대를 지킨 위업이 더 크다고 격찬했다는 내용이 그의 사위인 병조판서 이항복의 「백사집(白沙集)」에 기록되어 있으며,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단편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현재 정담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사당과 정려각이 그의 출생지인 경북 영덕군 창수면에 세워져 있으며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1999)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한편 정담 김제군수의 후예들은 경북 영양군 일원면 일대에서 충절의 명문가로 집성촌을 이루며 위국헌신의 맥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혹자는 김제군수 정담장군의 웅치혈전의 위훈을 이순신장군의 한산대첩,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김시민장군의 진주대첩, 동래부사 송상현의 동래성 사수 혈전, 의병장 조헌의 금산전투와 비견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 간에 간헐적으로 싸웠던 소위 백년전쟁(1337~1453) 직후 전승국인 영국이 프랑스 칼레시의 주요인사 6명의 목숨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칼레시 VIP 6명이 사형집행일에 서슴없이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놓고자 나섰으니 그지역 제일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 시장, 법원장, 귀족원로들이다. 이에 감복한 영국왕도 사면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들 6명의 VIP가 밧줄에 묶여 끌려가는 모습을 조각가 로뎅이 조각해 세운 상이 저 유명한 ‘칼레의 시민’상이다.

 

  칼레시(Calais)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 도버해협을 관통하는 해저 유로터널의 프랑스쪽 관문인 자그마한 항구도시로 ‘칼레의 시민’상은 노블레스 오블리즈(Noblesse Oblige : 높은 신분에 상응한 도덕적 책임)의 표상으로 이 지역 랜드마크이자 성지로서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다.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부터라도 정담 김제군수의 Noblesse Oblige 정신을 널리 알리어 오늘에 사는 이지역 후세인들이 길이 보전하고 높이 선양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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