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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품에 들다 - 소선녀 몽골여행기4. 신기루
4. 신기루
  
사진- 김영
 가도 가도 끝없는 지평선 때문이었을까. 
 
  황량하고 척박한 땅에 바짝 엎드려 잘 보이지도 않는 풀이, 제 등치보다 큰 꽃을 피우고 있어 그랬을까. 타자로부터 자유롭고 지 몸뚱이에도 해방된 녀석이, 허를 찔렀다. 
 
  마음의 더께를 흔들어, 쟁여진 옛일들을 떠올렸다. 굳어있던 가슴이 느슨해지며, 켜켜이 쌓인 먼지가 훅 불어지고, 지나온 시절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하지만 추억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오랫동안 골방에 묵혀 발효되면서 원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던 향과 빛깔이 생겼다. 
 
  중학교 시절이었다. 두어 살 위인 동네 오빠가 자주 우리 집에 놀러왔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마을 야산에서 따로 만나기 시작했다. 소나무 숲 안에 공터가 있었는데, 나란히 앉아 있곤 했다. 사람들 눈을 피하느라 어두워진 시간에, 그런 만남이 꽤 여러 날 계속되었던 것 같다. 시를 쓴 쪽지를 주곤 했지. 
 
  그러다가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서로 연락이 끊긴 채, 스무 살 중반이 되었는데, 갑자기 그 오빠가 찾아왔다. 결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던 것 같다. 그 사이 소녀는 여인이 되었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원하는 삶을 위해, 결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했던 거 같다.
 
  그리고 또 2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간간이 소식은 듣고 있었다. 고향 분의 장례식장에서 옆방에 그 오빠가 와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만나는 게 뭐 대순가. 대보름 밤, 그 야산에서 깡통을 돌리며 불놀이를 했을 때, 그 불꽃이 들어있던 눈동자도 가물가물해졌다.
 
  어쩌다가 다시 연락이 닿았는데 강원도에 살고 있다고 했다. 마침 그곳에서 연수가 있다했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곳과 가깝다며 저녁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선뜻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하루 전에 아무래도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 후, 10여년이 흘렀다. 우편으로 책을 한권 받았는데, 그 오빠가 시인으로 등단한 월간지였다. 이제 이순이 된 사진과 교장선생님이라는 프로필이 있었다. 꿈꾸던 선생님이 되었고 시인도 되었구나. 그의 시에 등장하는 그리움의 대상은 모두 나인 것만 같았지만, 아무렴 어떠랴.
 
달려온 어느 지점에 그런 알록달록한 시절이 있었지, 그것으로 족하다. 신기루 같이 사막에 있을 때, 어쩌다 잠시 떠오른다.
 
  남고비사막을 달려가다가, 이야기로만 들었던 신기루를 난생 처음 만났다. 목이 마른 생명에게 물이 저기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일까. 분명히 보이는데, 카메라에도 담아지는데, 저게 진짜가 아니란다. 믿을 수 없어 차를 타고 쫓아가 보았다. 아무리 다가가도 저만큼 물러나 있다. 여러 번 만났으나 번번이,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니 가슴이 뛰고, 사막을 견디는 힘이 난다.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신기루를 쫓아가면 안 된다고 하지만, 진짜가 아니면 어떠랴. 고유하고 사적인 공간이 점점 공동적이 되는 나이에도 여전히, 누구나 드나들 수 없는 보루, 내놓고 싶지 않은 땅이 있다. 그 땅은 불확실한 내 기억의 영토다. 
 
  드넓은 벌판에서 어찌나 빠르게 달리는지, 눈앞에서 금방 사라지는 가젤처럼, 정신없이 흘러가는 세월이다. 그럼에도 사유지를 버리지 못한다.
 

김제시민의신문  webmaster@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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