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랑한 목소리로 백만 단위 숫자를 쏟아내는 강사의 목소리에 학생들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산 알을 굴린다. 이윽고 셈을 제일 먼저 끝낸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답을 맞추면 학생들은 다시 주산을 정렬한 채 귀를 쫑긋 세운다.
60∼70년대 흔히 볼 수 있었던 주산수업 장면이다.
주산(주판 수판)은 컴퓨터나 전자계산기가 실용화되기 시작한 80년대 이전 가장 흔하면서도 유일한 계산도구였다. 은행이나 농협 등 금융기관은 물론 일반기업에서 소규모 가게와 가정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주산은 가장 중요한 자리에 위치했다.
주판만 잘 놓으면 취직이 보장됐고 그래서 머리는 있지만 가난한 학생들은 취직 잘되는 상고로 진학하는 것이 당연시됐다.
그래서 공부하기 싫은 사람은 중학교를 졸업한 뒤 취직이 잘 되는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게 당연한 일로 여겨졌었다.
인문고 출신들은 대학에 진학하거나 재수하는 동안에 상고출신들은 졸업하자마자 은행 같은 곳에 취직해 넥타이를 매고 근무하면서 상당한 액수의 봉급을 받았다. 그래서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상고가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70년대 이후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기능공도 취직이 잘 되자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상고는 그래도 취직을 위한 관문이라는 인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김제시 신풍동 김태경(36)씨는 "아버지가 나무를 팔거나 할 때 직접 주산으로 계산하는 것을 보고 자랐고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나 형들과 어울려 주산을 익혔다"며 "주산만 배워놓으면 어디가도 밥벌이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김씨도 김제상고에 입학해 졸업을 했으나 정작 꿈이었던 은행입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대학진학과 함께 현재는 정읍시청 공무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
김제상고를 졸업하고 수협에서 근무하다 현재 거제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문경순(40)씨는 "당시에는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이 가장 좋은 직장이었고 상고 졸업자의 입행 시험에는 주산이 필수과목"이라고 밝혔다.
주산은 60년대 문교부 주관 검증시험이 실시되면서 초·중학교 특기교육으로 채택됐고 한때는 사회교육으로도 실시됐다.
크고 작은 국내대회가 끓임 없이 열렸고 한국, 대만, 일본을 주축으로 세계학생주산선수권대회나 국제주산경기대회가 매 2년마다 열렸다.
전자계산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던 80년대에는 주산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해 TV에서 종종 전자계산기와 주산 대결이 벌어지기도 했다.
10년 전 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경리장부를 정리할 때 반드시 주산을 썼고, 일반 가정에서도 주산 하나쯤은 비치해놓고 있었다. 많은 돈을 다루는 은행에서도 전자계산기보다는 주산을 사용하는 직원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주산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 둘씩 사라지더니 이제는 아예 구경조차 하기 힘든 골동품이 돼 버렸다.
상고출신들이 왜 취직이 잘 되었는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주산을 잘 했기 때문이다. 일반학과공부는 물론 특히 부기 같은 것을 잘 해야했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단급 또는 1·2급 정도의 주산실력을 갖추는 일이었다. 노동부에서는 매년 치르는 국가기술자격시험에 주산을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이 시험을 통해 일정한 급수의 실력을 인정받는 것은 경리를 보는데 필요한 '면허'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런데 지난 2000년 1월부터 연3∼4회 실시하던 국가자격시험에서 주산이 폐지되었다. 그 이유는 산업화에 따른 인력수급을 위해 필요한 것인데 주산은 지원자가 없어 컴퓨터시대에서는 아무 필요 없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상업계 고교에서 주산과목이 사라진지도 오래다.
특히, 한때 '가난한 수재들의 집합소'로 불리며 높은 취직률로 명성을 날렸던 명문이었던 김제상고와 여상도 주산 대신 컴퓨터를 내세워 줄줄이 '덕암정보산업고'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만경여상도 이제는 아예 인문계 고교로 변신해 버렸다.
현재는 금산면에 위치한 금산상고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학원도 마찬가지.
학원 중에서 약 90% 이상이 주산학원이었던 것이 이제는 거의 사라진 채 컴퓨터, 디자인 학원으로 모두 변해 있다.
20세기 산업시대는 기술이나 기능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슨 기술(또는 기능)이든 하나만 갖고 있으면, 속된 말로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었다. 망치만 잘 두드려도, 대패질만 잘 해도 얼마든지 직업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산업사회였다.
물론 21세기인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기술이나 기능의 중심이 아날로그식 보다는 디지털식으로 바뀌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건설현장이나 공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기술자나 기능공보다는 사무실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을 하는 '컴퓨터도사'가 더 대접을 받고 있는 시대가 바로 요즘이다.
컴퓨터와 전자계산기에 자리를 빼앗기고 지금은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주산.
주경야독하며 애써 쌓은 주산실력으로 직장을 마련했던 40, 50대 중년들은 오늘의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남다른 감회를 가질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사회가 이미 컴퓨터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어진 정보화사회가 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김재수 kjs@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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