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가서 고향을 많이 생각했었습니다. 비단 이것은 저의 이야기인 동시에 10만 출향인의 공통분모이기도 한 것 입니다. 이제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고향을 더 많이 알리는 일이라 생각되어졌기에 정해진 신문의 틀을 비집고 나와서라도 고향의 한 모서리라도 소중히 알리기를 소망했습니다. 이런 인식 위에서 김제가 낳아준 한국화가 김영미 화백과 함께 부족하나마 이번 호부터 김제의 8경을 스케치하려 합니다. 많은 출향인들이 이야기하는 추억의 김제명소를 찾아 그들의 향수에 작은 보탬이 된다면 발품 팔아 그려 본 오늘의 이 그림은 분명 값어치가 있으리라 생각 되어집니다. 김제시민과 출향인 여러분의 애정어린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


김제의 8월은 언제나 온통 빈들처럼 보이는 녹색뿐이다. 그 녹색의 바다에서 지평선이 수평선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켜 마을은 언제나 그 녹색 위에 표류하는 섬들 같았다.

그렇게 평야는 밀물처럼 서풍에 밀려오다 모악과 만난다.

김제사람이면, 특히 김제의 동부지역 사람이라면 그 흔한 천렵한번 거치지 않고는 못 배길 곳. 모악산 금산사 밑 오리알터 저수지, 이곳이 바로 금평제이다.

금평제를 찾는 김제사람의 발걸음은 그래서들 가벼웠을까? 마흔 너머 사는 중년의 기억에도 이곳은 내 유년을 도배한 추억이 참으로 아스라한 시점으로 남아있기에, 언제나 특별한 고향의 여정이었던 걸 보면 금평제가 나만의 소유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7월 성하의 태양은 여전히 한참을 빛내고 있다가 금평제 가로변 당단풍나무에 걸려 그윽한 오후를 드리우고 있었다.

저 멀리 제법 듬직한 제비산 중턱의 월명암 암자가 이마만 보인 채 사연새겨진 증산도 마을을 내려다 보지만, 금평제 오리알터 저수지엔 지금 정작 오리는 없다.
없는 물오리에게 “돌아오라”를 주문할 순 없지만 돌아올 초겨울, 잊지 않고 찾아주는 그들이 오히려, 나보다 더욱 고향이 김제인 셈이리라.

김제를 떠나 서울에서 사는 죄로 당연히 고향김제를 많이 알리고자 했다. 그런 과정 위에서 타인들은 늘 김제를 궁금해 했을 것이다.
“지평선을 자랑하는 김제가 무슨 좋은 산이 있었겠냐”고 묻는, 김제를 모르는 외지인에게 금산사와 금평제는 늘 그래서 나의 위안이었고 자랑이었으며, 때론 내 유년의 전부를 대신하기도 했다.

갑자기 구두와 양말을 벗고 오리알터 상류의 시냇가에 발을 담그고 싶어졌다. 아직도 내 어릴 때처럼 피라미 잡는 고깃병과 낡은 다리위에서의 어설픈 다이빙이 행해지는 것을 보니 저절로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단지 그 많던 민물가재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곳 역시 만만찮은 사람의 손길이 탔음을 직감할 수 있었으나 아직도 시린 물속의 차가움은 예전처럼 싫지는 않았다.

잠시 황동규 시인의 ‘탁족(濯足)’이란 싯귀절이 떠올려졌다.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 아주 적적한 곳 /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 /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입을 때 / 흔들어 봐도 안 터지는 휴대폰 / 주머니에 쑤셔 넣고 걷다 보면 /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 범칙금 고지서까지 /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 시냇가에 앉아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다. / 팔과 종아리에 느닷없이 만나 새긴 / 화끈한 문신(文身)들! / 인간의 손이 쳐서 /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있다. / 요만한 자국도 없이 / 인간이 제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 >

그렇게 금산사 계곡과 금평제 가는 시냇가는 언제 보아도 나의 발을 담그고 싶은 곳이다. 역설적으로는 그만큼 내게 안식을 주는 고향의 첫 번째 유혹이기도 한 것이다.

저수지가에 늘비했던 예전의 포플러나무 숲은 없어졌지만 몇몇의 포플러가 그 흔적을 자취했다. 저수지 밑 개울가를 따라 원평 낙수동에 이르면 군락을 이루던 그 포플러들은 이제 제지공장 뒷마당으로 변해 질긴 세월을 은닉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저수지가로 오붓하게 들어선 2차선 수변도로에는 버드나무가 늘어서 유럽풍의 풍경화를 보는 듯 낮은 구도로 산책을 부르며, 이따금씩 서있는 커피자판기에 동전을 넣게 한다. 이곳의 또 다른 정겨움이기도 하다.

이 자판기커피를 들고 널브러져 있는 평상에 앉아 잠시 세상을 정지시키기도 하고, 더러는 동행한 일행에게 넌지시 ‘사는 것이 때로는 즐거운 일이노라“고 눈짓하는 다정함이 있는 곳.

사람들은 그래서 커피자판기가 있는 이 길을 ‘길 다방’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단돈 300원에 산 잠깐의 행복이 값어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차마 벗어던지지 못했던 상념의 외투들을 단 10분이나마 벗어두고 안식을 취했던 ‘탁족’으로서 가치가 더욱 값진 것 일게다.

정녕 소망컨대,오늘도 금산사 가는 길 초입에 닭전머리 등산가는 사람들은 널찍한 우회도로보다 이 좁은 길을 통하여 휴식을 예비하라!

산사 가는 길, 그 과정의 구도를 얻고자 한다면 금평제 오리알터 그 값싼 커피한잔에 녹아있을 사유의 흔적을 마셔버리고, 천천히 그리고 아주 길게 산책을 하며 마음의 탁족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오병환 기자 obh@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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