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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파이터' 최영의를 말한다'고향에 남아있는 최강 무도인의 혼'
전세계를 열광 속으로 몰아넣었던 종합실전격투기 'K-1'이 국내에 상륙하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침체되어있던 격투기의 인기도 서서히 증세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크랭크인되고있는 '바람의 파이터'와 '역도산'의 영화제작은 실존 격투가들의 삶을 다뤘다는 점에서 언론매체와 팬들의 무수한 관심을 받고 있는 중이다.

특히 '바람의 파이터'는 지난달 한 영화 전문 인터넷 사이트에서 네티즌 23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제 인물을 소재로 제작되는 영화 중 가장 기대되는 작품의 설문조사결과 47.5%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도마 안중근' '슈퍼스타 감사용' '아리랑' '청연' 등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을 만큼 벌써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영화의 실제모델인 고 최영의(일본명 오오야마 마쓰다쓰·전 국제공수도연맹 총재)씨의 고향이 우리지역 용지면이라는 사실은 이제는 공공연하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 최영의씨는 일본전통무예인 가라데를 변형한 극진가라데의 창시자로 전세계를 돌며 쿵푸, 검도, 복싱, 카포에이라, 프로레스링, 뮤에타이 등 각분야의 실력자들과 싸워 단 한차례도 패하지 않은 명실상부한 세계최강의 격투가였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명성이 쟁쟁한 그였음에도 정작 고국인 한국에서의 명성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이유는 단하나 그는 귀화인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최영의씨는 그래야만 했고, 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숨겨진 활동상은 어떠했을까?

용지면에 살고있는 그의 친형 최영범(86·와룡 산정마을)씨를 만나 진솔한 얘기를 나눠보았다.

일본인으로 살아야만했던 굴곡투성이 인생과 대부분을 삶을 공포와 싸워 이겨온 극기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최영범씨와의 일문일답

최영의씨와 정확한 가족관계는 어떻게되시며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허허…(웃음) 어떻게 살아왔냐고 물으니까 내가 갑자기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으이, 내동생이 유명한 것이지 내가 유명한 것인감. 우리집안은 모두 6남1녀로 난 그중 셋째, 영의는 바로 밑에 4번째였지. 원래 집이 좀 유복한 편이었던지라 우리형제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현재 살아있는 사람은 나와 다섯째 영정이 그리고 막내 영종이야. 다른 형제들은 대학교수로 언론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난 그냥 이곳에서 고향을 지키며 농사일만 했어.

최영의씨는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강했던 것인지요?

아무리 내 동생이라지만 직접 싸우는 것을 봤어야지. 다만 주변에서 말하고 동생에게 얼핏 들었던 얘기들을 통해 기억나는 것 몇 가지만 회상해 볼께. 먼저 코믹영화 '넘버3'에서 언급된 소뿔 날린 것이 기억나네. 도살장의 소들은 물론 스페인의 투우사들이나 상대하는 엄청난 체구의 소들과 맨손으로 대결하여 주먹한방에 즉사시키거나 소뿔을 수도로 날려 버렸다고 하더라고. 실제로 사진이나 영상으로도 봤고… 그외 일본유도의 자존심 '강도관'을 상대로 벌인 100대1의 싸움, 소림권법의 고수와 겨룬 온천에서의 알몸대결, 아! 그리고 언젠가 프로레슬러를 때려눕힌 후 곧바로 두 박스에 달하는 맥주병목을 손 날로 날려버리자 어떤 중년 흑인 한명이 다가와 손을 잡으면서 "당신은 '신의 손'(God Hand)'이요. 언젠가 당신의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아들한테 자랑해야겠소"하고 돌아갔다는데 아 글쎄.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중년흑인이 미국프로복싱사의 전설적인 KO왕 잭뎀프시였다는 것이야. 과거의 인물이라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잭뎀프시는 타이슨이나 무하마드알리하고도 비교할 만큼 엄청난 괴물복서였었지.

쟁쟁한 제자들도 많았다던데?

일본 청소년이 뽑은‘위대한 인물 10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나서 그렇지 않아도 많은 제자들이 대폭적으로 더 늘어났다고 하더군. 현재 전세계 140국에 1200만 명이 넘는 숫자의 제자가 있다고 하는데 스페인의 카를로스 국왕, 요르단의 후세인 왕, 모나코의 핫산 왕 등 여러 나라의 국가원수들이나 007의 숀코넬리, '유니버설솔저'의 돌프룬드그랜 등도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더군.

세계역사에 남을 최고의 격투가이면서도 정작 국내에서는 별반 인정을 받지 못하고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무척 민감한 사안일세 그려, 우리 동생이 고국과 고향에서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이유는 물론 일본인으로 귀화했다는 것이고. 핏줄에 대한 변명이라고 받아들여도 할 수 없지만 영의는 분명 내 조국과 고향을 잊지 않았고 많이 사랑했었지. 영의는 청년시절부터 힘에 무척 관심이 많았어. 일제시대 당시 영의는 좀더 큰 힘을 얻고자 일본대학을 갈망했었고 집에서는 굉장히 반대했었어. 난 결국 아버지 몰래 돈을 훔쳐다 동생의 등록금과 수업료를 챙겨줬고 그 일로 한참동안이나 불호령을 감수해야했지. 난 지금도 그 일이 잘했는지 못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지만 결국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의는 일본에 남게되었어. 전쟁통에 가미가제부대에 끌려갈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평발(집안의 유전)이라는 이유로 겨우 빠질 수 있었고 시대의 흐름 속에서 넘쳐나는(?)일본여자와 결혼까지 하게되었지. 당시 일본의 남성들은 전쟁에서 엄청나게 죽어갔고 정신대 역시 한국과 중국여자들이 대부분이었던지라 일본과부나 아가씨들은 그야말로 사방에 산적했었지. 결국 가족도 생기고 자신이 일도 하다보니 때를 놓치고 그렇게 일본에 남게 된거야. 하지만 천만다행이었던지 한국 아니 이곳 김제용지에도 동생의 호적은 남아있었어. 구태여 말하자면 이중 국적 같은 형태가 되었던 것이지. 하지만 아무리 생존의 한 방편이었다고는 하지만 귀화한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나도 약간 아쉬워.

어린 시절 최영의씨는 어땠는지?

정이 많고 머리가 비상하면서도 한번 하고자하는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마는 고집 센 녀석이었어. 최씨 고집이라고 원래 유명하잖아. 허허…거기에 우리 집안은 체구는 크지 않지만 타고난 강골 집안이야. 잔병치레도 없고 운동 같은 것도 쉽게 잘 배우는 편이지.

최영의씨를 생전에 자주 뵈었는지?

청년시절에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서로 먹고살기 힘드니까 왕래를 하지 못했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중년시절부터는 일년에 한번씩은 꼭 왔어. 용지에 아버님산소도 있으니까 더 그랬지.
키는 나하고 비슷한 평균키인데 워낙 근육질로 땅딸하게 뭉쳐서 좀 작아 보이더라고.
가끔 방안에서 맥주병목 날리기 같은 시범도 보여주었었고 일본에서 활동하던 사진 및 잡지 등을 선물로 놓고 가기도 했어.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

세계적으로는 영웅일지 몰라도 고국에서는 저평가 받는 것에 대해서 변호하고싶지는 않아. 비록 조국에 나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좋은 일을 한 것도 없으니까. 한창때인 60년대 동생이 창안한 '극진가라데'를 조국에 전파하려했지만 그때는 태권도가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홍보되던 때라 일찌감치 접을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도 있고… 동생은 나름대로는 자신이 창안한 무술이 고국에서 꽃피기를 기원했었거든. 현재는 부산에 지부가 하나있다고 하더구만. 아무튼 영화에서는 어떤 식으로 비쳐질지 모르지만 뼈를 깎는 고통과 공포를 이겨내고 서양의 거인들을 단방에 때려눕히기까지의 그 노력만큼은 인정받았으면 좋겠고 그런 사람이 우리지역의 피를 받고 자라났다는 것 정도는 기억해줬으면 좋겠네. 아마 우리 영의가 전세계를 돌며 결투를 하면서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김제를 지켜온 정기와 혼이 돌봐준 덕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어.

김종수  oetet@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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