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2년 3월 <경남매일>에 막 입사해 수습기자 교육을 받고 있을 때였다. 편집국의 한 선배가 우릴 불렀다. 우린 군기가 바짝 잡혀 부동자세로 선배 앞에 도열했다.
선배는 대뜸 우리에게 지갑을 꺼내보라고 했다. 어리둥절해 하며 각각 지갑을 선배에게 건넸다. 지갑을 하나 하나 열어본 선배는 “내 그럴 줄 알았어”하며 자신의 지갑에서 지폐를 한뭉치 꺼내 후배들의 지갑에 3만원씩을 넣어주며 말했다. “이건 선배가 그냥 주는 거야. 그리고 돈 떨어지면 언제든지 말해.”
그후 출입처를 배정받아 경찰서 기자실에 나가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타사 선배도 용돈을 주는 것이었다. 안받으려 했지만 “기자사회에선 원래 선배한테 얻어 쓰는 것”이라고 했다. 식당이나 술집에 가도 후배가 계산을 하는 것은 ‘불경죄’에 속했다.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우리도 기자사회의 이런 풍습에 차차 익숙해져 갔다. 나중엔 아예 후배가 선배의 지갑을 보자고 한 후 거기서 몇 만원쯤 빼가는 일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촌지관행이 낳은 기자사회의 독특한 풍습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우리의 월급이 고작 60~70만원 정도였으니, 별도의 촌지수입이 없었다면 과연 선배들이 그런 호기를 부릴 수 있었을까.
출입처에서 처음 촌지를 받았을 때였다. 어쩔 줄을 몰라 고민하다가 회사 선배에게 상의했더니 “그냥 써라”는 짤막한 답변이 전부였다.
기자출신이었던 당시 사장은 전체 기자들을 집합시켜 놓고 장시간 동안 정신교육을 하는 일이 많았다. 촌지에 대해서도 자주 얘길 했는데, “기자실을 통해 공식적(?)으로 나오는 촌지는 받아도 좋지만 기사와 바꿔먹어선 절대로 안된다”는 게 요지였다.
그런데 ‘기자실에서 나오는 촌지’라는 것도 그 액수가 만만찮았다. 아마 월 20~30만원쯤은 됐던 것 같다. 출입처에서 처음 맞은 추석 땐 무려 100만원이 훨씬 넘는 촌지가 ‘기자실을 통해 공식적으로’ 나왔다. 담당구역 안에 있는 병원이나 대학, 기업체 등에서 ‘떡값’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물론 출입처의 간부들이 주고 간 것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촌지를 호주머니에 넣은 채 불안한 마음으로 편집국에 들어갔을 때였다. 시청을 출입하던 한 선배가 조용히 나를 부르더니 “명절이지만 경찰서는 별로 생기는 것도 없지?”하면서 10만원이 든 봉투를 찔러주는 것이었다. 좀 있으니 또 다른 선배도 역시 같은 말을 하며 봉투를 챙겨줬다.
또 다른 한 선배는 “돈에 구애받지 않고 기자생활하려면 ‘스폰서’를 만들어라”며 친절하게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말하자면 학교 선배나 고향 선배 중 출세한 정치인이나 기업가를 한두 명 골라 정기적으로 용돈을 얻어 쓸 수 있는 후원자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물론 기자는 평소 그의 홍보 자문을 해 주고 언론의 힘을 이용해 그를 보호해 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식이다. 그 선배는 실제로 몇몇 기자와 지역 정치인·토착 기업가 등의 이름을 사례로 들어 ‘그렇고 그런’ 관계임을 설명해 주기도 했다.
스폰서를 만들진 않았지만 나 역시 촌지 관행에 서서히 물들어 갔다. ‘기사와 바꿔 먹지만 않는다면…’하고 자위하며 ‘어차피 내가 안받으면 다른 기자들 몫만 늘어날 것’이라는 논리로 촌지수수를 합리화하기도 했다.
솔직히 동료기자들로부터 왕따를 각오하고 혼자만 촌지를 거부할 배짱이나 용기도 없었다. 처음엔 촌지로 받은 돈을 기업체에서 부당해고를 당해 투쟁 중인 노동자에게 갖다주기도 했고, 이웃돕기 성금으로 내기도 했다. 그러나 서서히 부족한 용돈과 생활비로 쓰는 일이 많아졌고, 여름 휴가철이나 추석·설 등 명절이면 은근히 촌지를 기대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봉투가 나올 만한 상황에서 기대가 무산됐을 땐 섭섭한 생각도 들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타락해 갔다.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핑계로 외식을 할 때도 내 월급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한정식집이나 비싼 고깃집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내 타락의 절정은 95년 지방선거와 96년 총선취재팀에 있을 때였다. ‘기자실을 통해 나오는 촌지 외에는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깬 것이다.
심지어 나는 70년대 운동권 출신의 한 순진한 야당후보에게 “촌지를 돌려야 기자들이 신경을 쓴다”며 조언을 해주기까지 했다. 물론 변명할 말도 없진 않다. 후보측에서 주는 촌지를 끝까지 거부할 경우 그에게 적대적인 기자로 분류될 소지가 많고, 그럴 경우 취재원으로서 접근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야당후보에게 한 ‘촌지조언’도 내가 심정적으로 지지하던 그 후보가 언론에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게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그야말로 자기합리화요, 변명일 뿐이다. 내가 조언을 했던 그 후보는 선거에서 낙선했고 여당이 된 지금도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못하고 있다. 그를 볼 때마다 그때의 일이 생각나 부끄럽고 죄스럽다. 그후 나는 시의원들의 해외여행에 내 돈 한푼 안들이고 동행했던 일까지 있었다.
이런 타락의 대가인지 97년 겨울 병을 하나 얻었다. 심할 경우 다리 절단까지 갈 수도 있다는 버거씨병이다. 이 병은 특히 엄청난 통증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밤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동안 내가 지은 죄과를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경남도민일보 창간이 추진됐고, 나는 그동안의 기자생활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 작업에 참여했다. 농협에서 대출받은 700만원을 창간자금으로 내놓으면서 아내에게 “그 동안 받은 촌지를 토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 창간발기인으로 참여했던 동료들도 모두들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결국 우린 6000명의 주주와 함께 도민주주신문의 창간에 성공했고, 앞으로 절대 촌지를 안받는 기자가 되겠다고 도민에게 약속했다. 그러고 나니 정말 그렇게 홀가분하고 떳떳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큰 죄를 짓고 말았다. 경남도민일보 창간 1년만에 또 다시 거액의 촌지를 받은 것이다.
작년 5월 버거씨병이 재발하여 한 달간 휴직계를 내고 다시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 동료와 선후배들이 일일찻집을 열어 번 돈을 모두 약값에 쓰라며 가져온 것이다. 또한 평소 취재원의 관계였던 시민운동가들까지 촌지를 보내왔다.
아! 이 빚은 또 어떻게 갚아야 하나. 그게 요즘 나의 가장 큰 고민이다.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제공
김주완 기자(kjw1732@dreamwiz.com)
# 이 기사는 월간 <신문과 방송> 4월호 '취재수첩 에세이'에 게재됐던 것입니다.
# 김주완 기자는 경남도민일보 시민사회부 기자로 있고 <마창역사공부방>(www.masan315.org)이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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