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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는 방조제가 아니다①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벽골제가 바다를 막은 방조제라는 견해가 있다. 그 증거로는 이 제방이 바다에 거의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제내에서 뻘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도작문화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신생대는 4차례의 빙기가 있었으며 빙기와 빙기 사이에는 간빙기가 있는데 이 시기는 기후가 온난하다. 마지막 빙기를 뷔름 빙기라 하는데 7만년 전에서 1만 4천년까지다.

  그 이후는 간빙기에 속하는데 이때부터 지금까지를 후빙기라한다. 1만년 전부터 지금까지를 충적세라하며 이 또한 후빙기에 속한다. 지금으로부터 3천~6천년 전 사이에 기후는 가장 온난화 되었고 이때가 후빙기 중에서 해수면이 가장 높은 시기였다. 충적세 중기가 해면 상승의 극한이다.

 이 시기에 벽골제 저수지도 한동안 바다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1975년 2월 윤무병 교수팀에 의한 1차 발굴 조사에서 제방밑에 갈대와 저습성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음이 확인 되었고 방사선 탄소에 의한 연대측정으로 시축년대가 330년경이 틀림없음이 증명 되었다. 그러므로 서기 330년 당시에는 분명 육지 이었고 농경을 위한 수리시설로 만들어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발행한 <한국의 발견>이라는 책에서 김제시와 김제군을 소개하는 장에 '그 유명한 벽골제가 있는 곳'이라는 란에 "벽골제는 그 유명해진 이름만큼 실제로 그 내용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흔히 벽골제를 가리켜 저수지라 하지만 오늘에 우리가 생각하는 저수지와는 구조부터가 다르다"고 전제하고 오늘날 수리시설과 다른 측면에서 주장하고 있는 사학자 신규초의 또다른 주장을 소개한다.

  그의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벽골제 남쪽 이십리쯤에 있는 고사부리(고부)는 중국이나 일본의 교통 요충지로서 일본에서 임나를 거쳐 백제의 서울로 오는 길목에 갯벌이 있는데 이를 지나기 위하여 흙탕에 빠지지 않도록 돋우어 낸 길이 벽골제다. 길을 내다 보니 바닷물도 막고 제내에는 물이 고이게 되어 소택식(沼澤式: 沓형저수지) 경작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 후 이를 관개용수로 활용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길이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태종 때 크게 중수하고 세운 중수비에 수문위에 널판지를 깔아 통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이러한 사례로 일본 시즈오까현 도로 지방에서 늪지였던 곳을 발굴하여 널판지로 만든 논두렁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는 것이 그의 주장인데 이 또한 방조제라는 설과 흡사한 주장이다. 

  수리시설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성왕 11년(144)에 "제방을 보수하고 널리 농지를 개간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농지 경작을 위한 제방 축조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벽골제 축조보다 200년이 앞선다.

  그러나 사학자 이병도는 벽골제 축조시기를 마한시대 초기로 보고 있는데 모두 농경문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만 보더라도 "벽골지(碧骨池)를 개착"이라 하였는데 벽골제를 쌓기 전부터 벽골지라는 못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서에 지(池)라는 용어는 이때 딱 한번 나온다. 

  바닷물이 왕래하는 갯벌에 못이 있을 수 없거니와 해수가 조석으로 드나드는 갯벌에 뚝을 쌓는 것은 당시의 장비와 기술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만약 조수가 왕래하지 않는 갯벌이라면 땅이 굳는데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아 막대한 인력을 동원하여 길을 만들 필요가 없다.

  또한 온조왕이 고사부리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오는데 백제가 마한을 정복하여 금강 이남을 지배하게 된 것은 근초고왕 24년 일로 보는 것이 거의 일치된 학계의 견해이다. 진서(晋書)에도 서기 290년까지 마한과 사신이 오간 사실이 있으며 그 이후에는 기록이 없으나 진나라가 420년까지 존재하였으므로 삼국사기 기록과 진서를 종합해 볼때 마한은 서기 370년까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볼때 온조왕 때 고사부리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벽골제 축조연대가 비류왕 27년(330)이고 백제에서 금강 이남을 지배한 때가 근초고왕 24년(361) 이후라면 벽골제는 마한제국에 속하는데 마한에서 적대관계에 있는 백제의 서울을 왕래하는 길을 만들기 위한 제방을 쌓을 이유가 없다.(다음호에 계속)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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