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는 잘 마치셨는지요?

  올해 저는 고구마 농사를 지었답니다. 제 불찰이 크기 때문에 누굴 원망할 수도 없지만, 농사를 망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수확을 마치고 셈해보니 원자재 값이 더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자족하려 합니다. 성의 없는 농사꾼으로서, 제 정성보다 몇 배를 더 거두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만족이라는 것은 신이 나의 일상에 함께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요. 햇빛과 공기와 물과 대지는 본래 인간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니까요. 온전히 내 것이 아닌 밭에서 일구어 낸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신을 만나고, 느끼고, 품을 겨를이 없는 것이지요.

  그 시간이 좋았어요. 뻐꾸기 소리만 간간이 끼어드는 고요한 새벽, 모두 자는데 슬그머니 일어나서 흙 묻은 일복을 챙겨 입었지요. 고구마 밭에 가서, 순 하나 하나에 눈 맞추며 흙을 덮어 주려고요. 올 여름처럼 가물었을까요. 심은 순이 거의 다 말라 죽고 말았지요. 폭염이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심을 줄 몰라서 그런 것이었어요.

  농사법도 자꾸 진화하는 듯합니다. 고구마 농사를 하는 분에게 물어 보니, 순을 심고 비닐을 씌워 놓으라고 하대요. 그리고 5일 정도 후에 비닐을 열어서 순을 내 놓으라고요. 그런데 순위에 흙 덮는 것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계속된 가뭄으로 비닐 안의 흙은 물기가 전혀 없이 바짝 마른 상태였어요. 뿌리도 없이 줄기만 있는 것이 비닐 속에 알몸으로 있었으니 타죽는 게 당연했지요.

  호스를 연결해서 물을 주면서 다시 고구마 순을 심었습니다. 심으면서 보니 겉에 있는 잎은 다 타버렸어도 땅속에 줄기는 아직 살아있는 경우도 있더군요. 물이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호피족 인디언에게 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들려달라고 했더니, 물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데요. 당신들 부족이 부르는 노래는 강에 대한, 비에 대한 것뿐인가요? 그러자 인디언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물이기 때문이오. 그런데 당신들은 온통 사랑에 관한 노래던데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 아니오, 하고 되묻더라지요. 사랑받지 못하면 그 영혼이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물은 생명인 게지요.

  그런데 씌워놓은 비닐을 찢고 다시 심은 자리마다 큰 구멍이 생겼어요. 그 위에 또 흙을 덮어 주어야 했지요. 고구마 순이 햇빛에 노출되는 것을 막아 덜 말라 죽게 하려고,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해주고 싶어서, 바짝 마른 땅에서 흙을 퍼서 일일이 덮어 주었습니다.
 
  그래도 고생스럽다, 힘들다 여겨지지 않았어요. 고구마 순이 보고 싶고, 일으켜주고 싶고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그런 것처럼요. 자연이 사람보다 생명력이 강하니 잘 살아줄 것이라 믿었지요. 사람들은 힘들다고 농사일을 기피하지만, 생명이 자라는 것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어디에 비길 수 없었어요. 아이가 자라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되더군요.

  말복 무렵엔 고구마꽃이 피었답니다. 메꽃과라서 나팔꽃과 많이 닮은 고구마꽃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꽃이지만, 열대지방에서는 흔하게 본다고 하네요. 지구가 자꾸만 뜨거워져가고 있고, 우리나라도 기후가 아열대성으로 변해가고 있으니 앞으로는 도처에서 고구마꽃을 보게 될 거라고요.

  어쨌든 고구마꽃이 피면 좋은 일이 있대요. 해방의 기쁨과 맞먹는.

▲ 고구마꽃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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