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배가 저녁식사를 같이하자고 했다. 어수룩한 내게도 응원을 아끼지 않는 그를, 평소에 좋아하던 터라 기꺼이 응했다. 더구나 동석하는 사람도 맘에 드는 이었다. 그이와 함께 있으면 속이 푸근히 누그러들곤 했으니. 만남이 기다려졌다.

  그런데 그 자리의 주인공은 정작 따로 있었다. 꼭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 분이 있는데, 혼자서 감당하자니 어렵고 조심스러워 동반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들러리인 셈인데도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 주인공도 익히 알고 있는, 뵙고 싶은 분으로 내게 저장되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딛기 위해 받았던 직무교육에서 강의를 해주셨던 의대교수님이셨다. 가르침이 명료하고 상쾌했다. 대학병원 실습에서는 환자마다 자상하게 짚어주셨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고나할까. 격식을 차리거나 자신을 포장하는 것에 익숙한 시대에,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성향이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6개월 동안의 교육이 끝나고 그 분과의 인연은 끝났다고 여겼는데, 근 삼십년 만에 다시 뵙게 된 것이다. 예전의 모습이 여전했고, '참 좋은 질문이에요' 이렇게 맞장구치시는 것도 똑같았다. 자리를 마련한 선배와는 계속 교류가 있었는데, 최근에 쓰신 책을 보내와서 식사대접을 하고자 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 책 제목은 '우리 누나 임일순'!. 네 살 수준의 정박아로 76세에 세상을 떠난 누나의 그림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었다. 선생님은 책의 표지를 열고 정성껏 서명을 하시더니 동석한 우리에게도 선물로 주셨다. 다음날 새벽에 첫 장을 연 나는 단숨에 한권을 다 읽어버렸다.

  서문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여기 누나가 나하고 살면서 그린 그림을 모았다. 한평생 구석에서만 외롭게 살다간 우리 누나의 그림을 많은 사람이 봐주기를 바란다. 누나는 마음만 어린 것이 아니고 몸도 허약해서 보호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분이었다. 예전에는 누나를 부모 몫으로만 여겼으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난후, 우리 집으로 모셔오게 되었다. 그때서야 누나의 행복에 대하여 겨우 생각하게 되었다. 무시당해도 슬프다고 말하지 못하고, 학교도 가보지 못한 누나가 스스로 즐거움을 느낄 순 없을까.'

  그래서 누나에게 그림도구를 사다 주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면 온 식구가 밥을 먹는 식탁 옆 벽에 붙여놓았단다. 그림을 봐주는 관람객은 동생과 올케, 그리고 가사를 돕는 아주머니 세 사람뿐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관객은 누나, 자신이었다고 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진정 기뻐하였던 것이다.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고 완성되면 가져와서 붙여달라고 했단다.

  누나와 살면서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은 꼭 칭찬해주고 같이 있어줘야 한다는 것!, 누나는 작은 관심이나 보살핌에도 무척 기뻐하여 교수님을 감동시키곤 했다. 어쩌면 누나는 감추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나라면 집안의 치부로 여기고 꽁꽁 숨겨두지 않았을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에 주저하지 않고 아랑곳하지 않는 삶은, 높은 자존감을 지녀야만 가능한 것을. 한 번도 뵙지 못한 분이지만 그림 속에는 누나가 들어있다.

  저물어버린 지난해가 너무 허망하고 아쉽기만 하다. 그렇지만 어제 진 해가 오늘 떠오르듯, 다시 새해에 대한 소망을 품는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꽃피울 수 있게 함께 있어주고, 칭찬해주면서 살아가야지.

▲ 사람꽃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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