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트기 전 이른 새벽에, 배를 타고 연꽃 사이로 들어가 숨을 죽이고 있으면, 동이 틀 무렵 연꽃은 퍽 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꽃잎을 틔웠다. 사람들은 감탄사도 잊고 여기저기 꽃이 벌어지는 소리에 넋을 잃었다.' 다산 선생님이 마음이 맞는 벗들과 시 짓는 모임을 만들어 한 일의 기록입니다. 연꽃 피는 소리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새벽길을 달려갔습니다. 고요한 산사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 멀찌감치 차를 세워두고 걸어 들어갑니다. 아, 셀 수 없이 많은 흰 꽃봉오리가 초록바다에 둥둥 떠 있습니다. 아직 하늘도 깨어나지 않아 사방은 어스름한데, 백련은 두드러지게 선명합니다.
 
  그 고즈넉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 가만히 서 있습니다. 깊고 고결한 향이 그윽하게 제게 오는 것이 느껴지네요. 그리고 약간 매운 여운을 떠올립니다. 사고로 후각을 잃은 저는 기억 속에서만 향을 느낄 수 있지요. 그 향을 놓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는듯합니다.

  안타까워서 동행한 선배에게 향이 어떠냐고 물어봅니다. '음, 너무 좋아, 그런데 장미나 백합처럼 화려하거나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해. 해이해진 정신을 다잡아주는 듯 긴장시킨다고 할까.' 선배가 직접 만들어온 생맥산 맛이 연향과 닮아있습니다.

  연꽃은 나흘 동안 피는데 이틀째 향기가 제일 좋다고 합니다. 아침 6시쯤 꽃봉오리를 열었다가 저녁 5시쯤엔 다시 닫고요. 연차를 즐기는 사람들은 이틀째 핀 꽃이 오므라들 때, 약간의 차를 봉지에 싸서 노란 꽃술위에 넣어둔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꽃이 문을 열면 꺼내어 우려 마신다지요.

  초막에 올라앉아서 연지를 바라봅니다. 이곳 하소백련지는 청하산이 품고 있습니다. 소나무산이 구부린 새우등처럼 둥글게 연지와 청운사를 에두르고 있습니다. 나름 질서 있게 핀 순백의 꽃들이, 분주한 제 속을 잠잠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서로에게 걸려 넘어지는지요.

  연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많습니다. 저 줄기 밑에서는 구멍이 뻥뻥 난 연근이 굵어지고 있겠지요. 공기주머니랍니다. 연근은 개흙에 묻혀 있으니 자체적인 호흡에 필요한 산소가 절실하지요. 제 몸을 비워서 저 연들을 살리고 있는 겁니다. 무엇인가로 꽉꽉 채우려고 안달하고 욕심을 부리고 있으니, 처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숨구멍을 내고 사는 연이 부럽기만 합니다.

  연의 멋은 꽃에만 국한되지 않아요. 옛 선비들은 연통음이라 하여 연잎을 술잔으로 삼아 기다란 연잎대를 통해 음료를 마시며 더위를 이기기도 했다지요. 자연에 동화된 멋의 여유입니다. 저도 스승님을 모시고 글벗들과 즐겨본 기억이 있지요.

  연못가에 뒷짐을 지고 서 계신, 이곳을 조성하신 도원스님을 뵈었습니다. 수많은 내방 손님들에게 연꽃차를 대접하느라 입안이 다 헐어버린, 그분의 표정에 꼿꼿함이 들어 있다고 느껴지는 건, 남다른 길을 가는 분이기 때문일 겁니다. 뻣뻣한 오만이 아니라 고집 같은 거요. 한 사람의 발상과 의지가 이 장관을 이루어냈습니다. 열심을 품고 최선을 다하면 이루어지는구나. 할 수 없다고, 불가능하다고 놓아버린 내 꿈을 꺼내어 다시 만지작거리게 되더군요.
 
  새벽 연지가 깨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연꽃 피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특, 하고 여린 소리가 들린듯하여 돌아보지만, 연잎이 바람에 부딪힌 것인지, 개구리가 덤벙거린 소린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번잡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해서인가봅니다.

▲ 사진: 최진만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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