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이 황금색으로 물들었습니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눈부신 들판을, 눈을 가늘게 뜨고 자주 바라봅니다.

  논마다 고개 숙인 벼들로 그득합니다. 연두색으로 시작한 봄부터, 차곡차곡 쟁여온 색이라서 이렇게 찬란하게 아름다울까요. 흐뭇해진 마음이 부자이게 합니다. 살아있음이 아름답습니다.

  슬픔과 절망으로 보냈던 지난 봄이 생각납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무사귀환을 빌며 가슴 졸였던 날들, 오열하는 가족들과 하나 둘 늘어가는 희생자들을 보며 속상했던 날들, 올봄은 참담했습니다. 죽음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농부들은 맥 놓고 있을 수 없었지요. 살아있는 사람들을 먹여서 추스를 수 있도록 돌봐야 하니까요. 그래서 논을 고르고 모내기를 했습니다. 연초록 물결이 눈물을 헹구고 맑게 했지요. 벼는 그 여름 뙤약볕을 견디고, 태풍도 이기고, 꽃을 피웠습니다.

  벼꽃을 본 적이 있나요? 벼도 열매인 나락을 맺기 위해 꽃을 피운답니다. 줄기 속에서 이삭이 생기면 위로 힘차게 솟구치는데 이것을 출수라고 하지요. 그리고 다음날 새벽녘에 꽃을 피워 딱 하루만 핀답니다. 그래서 논 전체적으로 벼꽃을 볼 수 있는 시기는 삼사일 정도지요.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잘 볼 수 없어요. 반으로 갈라진 벼 껍질 속에서 6개의 수술이 나와 있고, 암술 1개는 보일 듯 말 듯 껍질 속에 숨어 있지요.

  꽃잎 노릇을 하는 벼 껍질은 수술이 늘어질 때를 기다렸다 껍질을 닫고 자가수분을 합니다. 그때부터 쌀이 생성되는 것이지요. 벼꽃의 특징은 꽃잎과 꽃받침이 없고, 하나의 꽃이 한 톨의 쌀이 됩니다. 벼꽃이 피면, 농부들도 논에 들어가지 않는데, 올해는 비가 너무 잦아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지난해에는 비가 없이 그토록 가물더니, 올해는 해가 너무 덜 들었네요. 닷새쯤 따사롭게 볕을 비추고 나서 하루쯤 비가 오면 딱 알맞을 텐데, 한 이틀 뜨끈뜨끈 하고 하루는 구름이 살랑살랑 흐르다가, 이틀 뜨끈뜨끈 한 뒤 비가 한 줄기 시원하게 내리면 꼭 알맞을 텐데, 가끔 소나기가 한 차례 뿌리고는 다시 말끔히 해님이 고개를 내밀면 참으로 알맞을 텐데요.

  처서에 비가 오면 농사에 좋지 않다고 합니다. 벼꽃이 피는 시기이기 때문이지요. 며칠 계속되는 비가 벼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봐 염려했습니다. 벼꽃을 헤아리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 동네는 벼꽃 때문에 초여름부터 가로등도 꺼놓는답니다. 이렇게 농부는 농사를 자식처럼 여깁니다.

  올해는 윤달이 들어 추석이 빨랐지요. 추석에 햅쌀밥을 먹지 못했지만, 때를 맞춰 이삭대가 나오고, 벼꽃이 피고, 알곡들이 여물어가는 걸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으신가요? 저는 어릴 때부터 시골에서 살고 있지만, 제 논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땅을 갖고 싶어 하지요. 그리고 가진 영토를 넓히고 싶어 합니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도 땅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땅을 차지하려 하지요.

  하지만 전쟁이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땅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의 영토입니다. 국토를 잃어버렸지만 이스라엘이 가진 금융시스템, 싸이가 가진 음악, 메시가 가진 축구가 그렇지요.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이 영토는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이 값진 것입니다. 이 꿈을 지켜가려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하는 것이 힘겨운 것이지만요.

  누구도 흔들거나 빼앗아 갈 수 없는 땅! 이런 마음의 영토가 당신에겐 무엇인가요?

소선녀  수필가/상정보건질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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