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바이올렛

  새해가 시작되어 몇 날이 흘러갔습니다. 생명을 연장 받은 감격을 잃지 않고, 마음에 정한 일들을 이뤄보려는 기대에 차있는데, 벌써부터 계획에 차질이 생기네요. 상담심리학을 부전공 해보리라 벼르고 있었는데, 학점이 모자라 자격조차 안 되고요. 

  해오던 일을 끊어버리리라, 새로운 일을 꾸준히 실천하리라, 다짐했던, 의지가 필요한 일들은 어렵게 느껴져서 엄두가 안 나고요. 그러자 계획을 세우며 기세등등하게 우쭐거렸던 모습이, 어느새 가라앉아 무덤덤해져서 모든 것이 여전합니다.

  그러던 중 한동안 잠잠하던 바이올렛이 꽃대를 올려 꽃을 한 송이 피웠네요. 어찌나 어여쁜지 보랏빛 꽃부리를 자꾸 다가가 들여다보게 됩니다. 항아리 뚜껑에 구멍을 뚫어 만든 화분과 어울립니다. 한 동네 진이네가 새순을 내어 가져다준 것을 네 포기 심었던 것인데요. 봄부터 가을까지 시샘하듯 번갈아가며 꽃을 피워대더니 추워지면서 주춤했었거든요.

  생명이 주는 기쁨은 멈추지 않고 샘솟듯 하지요. 그처럼 반가운 손님이 요즘 우리 진료소에 자주 놀러온답니다. 바로 막 돌을 지낸 여자아이 해리입니다. 그 녀석이 오면 진료실은 단박에 웃음꽃이 피고 화기애애해진답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지요. 게다가 두 눈을 감고 윙크를 날리기라도 하면, 환호성이 일어납니다. 그렇지요. 그 기꺼운 기분을 어디에 비할까요.

  그런데 해리 할머니에게는 걱정이 있습니다. 농한기가 지나고 봄이 오면 해리를 부모에게 보내기로 했는데요. 할미가 아무리 잘 돌봐줘도 어미의 훈짐만 못한 것이니 백번 잘된 일이지만, 맞벌이 하는 부모 때문에 어린이집에 가야하는 어린 것이 안쓰럽기 때문이지요. 일 년만 더 키워주고 싶기도 한데, 빨리 안정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기게 된 사건이, 일어났지요.

  바로 어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울기 시작한 해리가 계속 악을 쓰면서 그치지 않더랍니다.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었대요. 그래서 어디가 아픈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어, 병원에 데려가려고 허둥지둥 옷을 입히고 차에 태웠는데, 그제서야 슬그머니 풀어졌다고 해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할아버지하고 잠을 자고 일어나서 그랬다는 것을 알았지요. 늘 할머니가 안고 재웠는데, 그날은 할아버지 옆에서 잠들었기에 그냥 놔뒀더니, 아침에 일어나서 놀란 것이지요. 하기는 태어나서 일 년 동안, 양육자가 엄마, 친할머니, 외할머니. 이렇게 세 번이나 바뀌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저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둘째아이가 돌이 되기 전에 삼사일 교육을 가게 되어 친정어머니께 맡긴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 저에게는 절대 안기지 않고 가까이 가기만 해도 자지러지게 우는 것이에요. 하루정도 지나서 괜찮아지긴 했지만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요. 말도 못하는 젖먹이지만 다 느끼고 아는 것을. 엄마가 어디 갔을까, 왜 안 올까, 속으로 얼마나 애가 탔으면 그랬을까요.

  한 할머니는 손녀를 5개월 동안 키워서 보냈는데, 빈자리가 너무 허전하고 섭섭해서 다시 데려오라고 하셨대요. 그러자 모두들 어미 품에서 커야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리네요. 네 살 된 아이는 아빠를 그리워하면서도, 전화만 오면 툭 끊어버린다는 이야기에, 일순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보고 싶은 나머지 그러한 것이지요. 얼마나 원망스러우면 저럴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립니다.

  필수 영양소를 섭취하지 못하면 병에 걸리듯,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소속감을 갖고자하는 근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마음에 병이 납니다. 이 나라가 맘 놓고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여건이 되기를, 새해 계획을 통틀어 소망합니다. 생명은 최고의 가치니까요.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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