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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소선녀의 푸나무들의 노래65. 배롱나무

 

사진: 나인권

딸아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맞은 편 창문 가득, 꽃숭어리가 보여요. 아아, 새 각시 다홍치마 같은 저 절정이 달콤해서, 한숨 가만히 서있습니다. 창문 블라인드를 한껏 올려놓고 말이지요. 그 어여쁨에 물들고 싶어서, 이방에 자주 들어오게 되네요. 삶은 서글프고, 외롭고, 그립고... 그러하니까요.

  지금은 가지마다 꽃을 피웠지만, 이 배롱나무는 큰 시련을 겪었답니다. 유난히 추웠던 어느 겨울, 동상에 걸린 것이지요. 늦게 서야 잎을 내는 녀석이라 쉽게 눈치 채지 못했는데, 윗가지들이 삭정이가 되어 툭 툭 부러져 내리더라고요. 십여 년 동안 키워온 제법 굵은 가지들을 거의 잃고, 달랑 한 가지 정도만 알량한 꽃을 피웠어요. 그래서 겨울마다 짚을 입혀주었답니다. 나무는 시나브로 기운을 내데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다시 새로운 줄기를 내고 무성해지데요. 당당해져서 자기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더군요.

  몇 해 전엔, 뜰에 목련나무를 심은 적이 있어요. 울안에 목련나무가 있는 집이 얼마나 부러웠던지요. 처음같이 순결한, 그 뽀얀 꽃이 피어있는 집안에는, 무언가 신비한 것이 있을 것만 같았거든요. 마침 마을 식목행사를 하는 참에 얻어다가, 앞마당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심었답니다. 그랬더니 바로 이듬해에 꽃을 많이 피우더라고요. 얼마나 좋았던지. 그런데 해가 거듭될수록 꽃송이가 줄고, 강풍에 뿌리가 들리더니,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옮겨 심어진 나무는 환경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토양에 밀착하고 결속하는데 집중해야 했던 것이지요. 그 목련 나무는 꽃을 피우는데 지나치게 고양되었던 것이, 죽음의 원인 아니었을까요.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면서 뿌리의 깊이를 더하는 일에 골몰하였더라면, 어찌되었을까요.

  나무에게 있어 잎과 꽃은 욕망의 표현입니다. 뿌리가 생명의 중심이고 토대인 것이지요. 기반을 소홀히 하고, 과도하게 잎과 꽃에 치중하면, 나무는 전체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목련나무를 보며 배웠네요.

  나무들은 일반적으로 지상부와 지하부의 비율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땅속뿌리와 지상의 줄기 및 가지의 비율을, 거의 일대일로 유지하여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 배롱나무가 가지들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뿌리는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지탱할 수 없었겠지요. 모든 것을 붙잡고 버티려는 것만이, 좋은 자세는 아니더군요.

  우리는 모두, 중요하게 여기며 키워온 가지를 잃어버린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살아있다면 누구나 그러하겠지요. 행여,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여태껏 가슴 시린가요. 공들인 모색을 성과로 축적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지만요, 고난도 받아들이면서 뿌리를 더욱 곤고히 하자고 마음을 달랩니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넘어지는 일이 없으려면, 오히려 스스로 버리거나 잃는 것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상실의 지혜는 자연스러운 생명의 원리인 것을요.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에 마음 쓰지 않습니다. 다수가 선택하는 길을 벗어난다고 해서 낙오가 아니고, 이 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보편적이라는 기준이 오류를 면제해주지 않지요. 아니다, 고 생각되면 그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오는 동안 그 많은 우회로와 막다른 길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것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지요.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마음이 원하는가.

  배롱나무는, 언제나 다시 시작하더군요.

김제시민의신문  webmaster@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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