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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소선녀의 푸나무들의 노래90. 새순

 

사진: 나인권

"엄마 별명이 뭔지 알아? 소프트아이스크림이야"
  "왜?"
  "애교도 많고 상냥하다는 거지"
  "엄마 애교 별로 없는데?"
  "딸한테 애교 떨일 있니? 아빠한테 하지" 
  "에이, 아빠한테 그러는 거 못 봤어요"

  저런, 공감을 얻지 못하네요. 딸이 본 게 맞겠지요? 더이상 남편에게도 소프트아이스크림이 아니라니, 흠, 따져봐야겠는걸요. 이 별명을 얻은 것은 고등학생 때였어요.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친구 엄마가 '어쩌면 그렇게 아양을 잘 떠니, 살살 녹는구나. 아이스크림으로도 모자라니 소프트아이스크림이다' 그러셨거든요. 너무 좋아서 그 뒤로 이 별명을 떠벌리고 다녔는데 말이죠.

  딸을 기르면서 제일 많이 한 잔소리는 '말을 예쁘게 해라'는 것이었어요. 학교에 들어가더니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말이 거칠어지더라고요. 사춘기 때는 더욱 심해졌고요.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거나, 바닥에 탁 내팽개치듯 어투가 사나워졌죠. 어휴, 그때 얼마나 속을 끓였게요. 그런데 모범을 못 보여줬다니, 말짱 도루묵이네요. 
  다행히도 자라면서, 속이 깊어지고 상대방을 배려하게 되더라고요. 당연히 말도 깎은 배같이 사근사근해졌어요. 같이 있으면 얼마나 기분 좋아지는데요. 우리 딸 별명은 무지개에요. 대부분 별명은 놀리느라 장난스럽게 짓게 되니, 비속어가 많잖아요. 집에서라도 애칭으로 불러주면 좋겠어요. 이름은 그 사람됨을 만들어가는 값진 것이니까요. 신혼 때는 '허니'라고 부르면서 달콤한 시절을 지내지만, 사는 일에 치이다 보면, 자연스레 말이 삭막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애교도 바닥 난 것이고요.

  언어에 대한, 강창옥씨의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참 대단한 사람이더라고요. 그의 토크쇼가 있었던 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이 빈자리가 없었어요. 세 시간을 내리 청중을 웃겨가며,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가더군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잘 사는 길은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어요. 특히 오랫동안 같이 지내야 하는 결혼에 있어서, 여자는 모국어를 잘하는 남자를 만나고, 남자는 말을 예쁘게 하는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요. 여기서 모국어란 연애 시절에 호르몬 영향으로 잠시 부드러워진 언어 말고, 원래 그 남자가 쓰는 말투를 뜻한대요. 그러니까 외모가 보기 좋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원래 모습인 본성인데, 그것이 말을 통해 나온다는 것이지요. 

  말이 나왔으니 남편 흉 좀 볼게요. 부드러운 말투와는 거리가 먼 남자였어요. 결혼해서 적응하느라 엄청 힘들었지요. 꼭 싸우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대화하기 싫었어요. 아이들에게도 엄격하고 쉽게 화를 냈고요. 속은 다정하고 자상해서, 먼저 챙겨주고, 기저귀 가방을 늘 들고 다녔는데도 말이지요. 남편 별명이 돌콩인데, 그 딱딱한 콩 삶느라 얼마나 애달았게요. 그런데 삽십 여 년 함께 살아오면서 많이 고쳐진 걸 보면, 노력하면 모국어도 바뀌더라고요. 이제 누구보다도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 됐죠. 그래도 그 성질 어디 가냐고요. 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지만, 뭐, 어쩌다 그러니 참을 만해요. 어쨌거나 돌콩이 야무지고 실속있는 것만은 틀림없으니까요. 

  남편 서재에는 십년도 넘게 키워 온 파키라가 있어요. 잎이 햇볕 받는 쪽으로만 웃자라고 칙칙하길래, 큰맘 먹고 모든 잎을 쳐줬어요. 그리고 구석에서 좀 내놓고 쌀뜨물을 줬지요. 보세요, 새순이 나오고 있어요. 연약해 보이지만 생명의 근원에서 나오는 자기다움을 뿜어냅니다. 쫄지 않고 우쭐대지 않으면서, 당당합니다. 꼭 나무가 건네는 말 같아요. 부드러운 기운이 뻣뻣해진 나를 푹 감싸버리네요. 

  다시 소프트아이스크림이 되어보려고요. 

김제시민의신문  webmaster@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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