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올레를 5일째 걷고 있는데 이상해요. 나란히 출발했던 일행들이 어느 한 순간 각자 걷게 돼요. 누가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자연스레 그리 되네요. 처음에는 상대방과 떨어져 걸으면 서로 기다려 주었는데 지금은 혼자 걸으면서 또 함께 걷게 되네요. 아니 함께 걷고 있으나 혼자 걷는 거지요.

  대학 다니던 시간들 생각나요. 미팅 후에 디스코텍으로 가는 것이 유행이던 때였지요. 고등학교 때까지 묶여있던 시간에 복수라도 하듯 삼삼오오 짝을 지어 미팅을 하고 디스코텍으로 가곤했는데 지독한 몸치인 나는 디스코텍도 낯설었고, 미팅도 좀 유치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 도서관에 가는 것이 내가 수업 외에 유일하게 하는 일이었어요. 이해하지도 못한 채 형이상학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두꺼운 철학 책을 날마다 읽었어요. 그러는 나를 친구는 시국에 무심하다는 이유로 '창백한 지식인'이라고 비난했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당장 내가 급했어요. 물론 데모대에 끼어 학생회관 야간농성에도 가보았고, 길거리에 나가 최루탄을 맞아보기도 했지만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외침은 공허하기만 했고 그냥 시류에 흔들리는 허수아비 같기만 했어요. 나는 나를 어떻게 직조해야 할지 몰라서 허든거리기만 했어요. 부모의 뼈를 날마다 녹작지근하게 우려내면서까지 나는 왜 대학에 오고 싶어 했는지 알아야 했어요.

  「alone」

  굵은 매직으로 자취방 벽에 대고 커다랗게 써 놓았어요. 대학에 오면 어떤 방법으로든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강의를 들어도 책을 읽어도 비슷한 해답조차 찾아내지 못했거든요. 누가 나를 끌어줄 거라고 생각했지요. 손을 내미는 사람도 없었지만 손잡고 따라가고 싶은 사람도 없었어요. 결국은 나 혼자서 이 문제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나만 외롭고 고독하다고 생각하고 디스코텍이나 미팅을 즐기는 친구들은 외로움이나 고독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외로움이나 고독하고 친구하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어요. 

  친구도 만나지 않았고 학교도 나가지 않았어요. 밥도 먹지 않았고, 책도 읽지 않았어요. 까닭 없이 인생이 슬프고 괴로웠어요. 그리고는 커다란 벽을 마주하고 앉아서 'alone'이라는 글씨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지요. 우리말을 두고 영어로 쓴 건 지금 생각해도 유치해요. 같이 살고 있는 동생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한다고 깜냥에 수를 쓴 건데요. 그 때 동생들은 교대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alone'이라는 단어가 'all + one'으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모두 아니면 하나' 달리 말하면 '모 아니면 도(all or nothing)'로 생각되었어요. 그렇다고 인생이 '모 아니면 도'는 아닐 것 같았어요. 며칠 뒤에 'all+one'이 '모두가 혼자다'는 말로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all=one'으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모두가 나하고 똑같은 외로움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살고 있는데 나만 혼자 외롭고 고독하다고 어리광을 했지요. 다른 사람들은 외로움과 고독을 친구하면서도 모나지 않게 잘 살고 있는데 나만 유독 방에 들어앉아 버렸지요.

  군밤장사 아저씨 같은 점퍼를 걸친 성이 가을 찬바람을 데리고 자취방에 불쑥 나타났어요. 휴교령이 내렸던 게지요. 문도 열어주지 않는 내게 전쟁이 날지도 모르겠다면서 충북의 고향집 주소를 제 방문 한 구석에 아주 조그맣게 써 놓고 갔어요. 여자들은 전쟁이 무엇인지 모른다며 혹시 전쟁이 나걸랑 책을 그리로 보내달라는 말을 남기고 성은 갔어요. 골목길을 돌아가는 성의 뒷모습을 보며 하고 많은 친구들 두고 왜 내게 그런 숙제를 줄까 잠깐 의아했어요. 죽을 각오를 하고 군대에 불려갈 생각을 한 성이 가여웠어요.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대학생활을 즐기고 있었어요. 그 때 문과 여학생들과 상대 남학생들이 독서토론 써클을 만들어 모이고 있었는데 거기도 참석하지 않았어요. 난 아주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나중에야 성이 말했지요. '너만 외롭고 고독한 거 아니다. 모든 존재는 모두 고독하다. 그러니 끝까지 가라앉았다가 바닥에 닿으면 그 때 나와라. 그도 싫으면 세상 그만 살면 고독도 없어진다'고요. 나도 마침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던 때라 고개 끄덕이며 들었지요. 생각해보면 젊은 치기에 불과한 말장난이었으나 나는 홍역을 치르고 난 기분이었어요. 그러는 동안 가을 다 가버리고 겨울도 훌쩍 넘었어요.

그래도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어요. 이듬해 봄이 되면서 더 짱짱해지고 제법 통통해져 다시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으니까요.

  올레길에 함께 나선 일행들이 한참 앞에 가고 있어요. 나는 혼자서 한참 떨어져서 걷고 있어요. 비록 옆에서 나란히 가고 있지 않지만 저들은 나와 동행이 틀림없어요. 나도 그들의 이웃이고요. 함께하면서 홀로 걷고 있어요. 모두가 하나도 되고 하나가 모두도 돼요. 그래서 나도 이웃이고 세상의 모든 이웃이 나도 되네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네요. 어쩌죠? 나 아직도 이웃이 나처럼 여겨지지 않는데...

▲ 함께와 홀로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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