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를 걸으려면 이정표를 잘 찾아내야 해요. 물론 눈에 잘 띄게 해 놓은 곳도 있지만 놓치기 쉬운 곳도 있어요. 올레 이정표는 땅바닥이나 전신주, 건물 벽 같은 곳에 파란색과 노란색 페인트로 화살표시를 해놓았어요. 나무에 리본으로 매달아 놓기도 했지요. 그런데 이들 표지는 순간 방심하면 잃어버려요. 어떤 길은 이정표 없으면 정말 찾아들어가기 힘들지요. 그러다 보니 올레 걷는 내내 이정표에 대해 신경을 꽤 쓰게 되지요. 간혹 이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은데 정해진 길을 따라 걷지 않으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어요. 

  사람들은 여행지에서 이정표를 보면 설렌대요. 그런데 올레에서는 이정표도 숙제처럼 해야 하는 공부예요. 사실은 사람들이 이정표를 보고 설레는 게 아니라 이정표에 쓰여 있는 목적지를 보고 설레겠지요.

  이정표가 간절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지요. 시골에서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없이 흙먼지 뒤집어쓰면서 신작로를 걸어 학교에 다녔지요. 참 무료하고 건조한 길이었어요. 출구도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 길을 그냥 무작정 걷다보면 학교에 닿기도 하고 집에 닿기도 했어요. 

  성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참 그렇게 그냥쟝 살았을 거예요. 바흐의 브란덴부르그 협주곡을 설명해 주고, 영어회화를 유난히 잘했던 성을 만났지요. 아버지가 안계신 집안의 장남이었어요. 홀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부양하느라 농사를 짓던 성. 고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성. 클래식음악에 조예가 깊었지요. 

  자벌레를 오랫동안 들여다 본 적이 있어요. 꼭 나뭇가지처럼 생긴 자벌레는 나뭇가지와 완전하게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자벌레가 되어 제 길을 갔어요. 제 몸을 구부렸다 폈다하며 기는 자벌레는 제 몸길이만큼이 한 걸음이었어요.

  성이 자벌레같다고 생각했어요. 자벌레가 나뭇가지와 하나가 되어 길을 가듯 성도 논바닥과 하나가 되어 길을 갔어요. 성도 자벌레처럼 머리와 다리를 둥그렇게 접었다 폈다 하며 논바닥을 기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부모에게 어리광부리고 투정할 나이에 성은 제 몸 외에는 손톱만큼도 보너스가 없는 길을 가고 있었어요.

 그런 성을 보며 나도 내 인생의 목표를 세웠어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중간중간에 이정표도 세웠지요. 이정표대로 실행해서 목표에 도달하는 일이 그리 녹녹하지 않더군요. 그럴 때마다 불평하고 실망했어요. 그러다 성을 생각하며 다잡곤 했어요. 그래도 걸핏하면 흔들렸어요.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 평생을 연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위대해요. 지금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성이 그렇지요. 난 성처럼 위대한 사람은 못될 것 같아요. 태어난 환경과 유전자적인 기질에 순응하며 사는 보통 사람이에요. 그저 신이 내게 허락한 길을 걷다가 다시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길을 걷다 친구도 만나고 산, 바다, 꽃도 보겠지요. 가족도 이루고 사회에 발을 디밀어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그저 살겠지요. 그 안에서 작은 성취와 실망을 반복하다가 또 다시 순명하게 돌아가겠지요.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를 할 때 난 다시 태어나도 독립 운동가는 못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해요. 치열하게 살아본 적이 없어요. 좋아하는 여행도 책읽기도 내가 노력하지 않았어요. 주어진 기질과 유전자에 순응했을 뿐이에요.

  성이 볼 때는 나 참 못났지요? 그래도 살아있으니 예쁘지 않아요? 비록 굽었어도 살아있으니 예쁜 나무처럼요. 성 엉뚱한 질문하나 받아주세요. 하늘에 문이 있을까요? 성 대답 내가 듣지 않아도 다 알아요. '얌마, 하늘 전체가 다 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라고 하실 거죠? 내 일상도 그렇게 봐 주시면 안될까요?

▲ 자벌레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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