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올레길을 걷지 않고 집에서 쉬기로 했어요. 밀린 빨래를 하고 김치를 버무리기로 했어요. 여자들이 두 명이나 더 있어 부엌이 좁다는 핑계로 나를 방으로 쫓아내네요. 그냥 아무 일도 안하고 놀려고 마음먹은 날이라 책도, 노트북도 다 던져 버리고 리모컨을 들고 여기저기 돌려대고 있었어요. 오징어를 질근거려가면서요. 부엌에서 김치를 담고 있던 일행이 들어와서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대요. 지금 김치를 세숫대야에 버무리고 있다고. 그래서 자기는 김치 안 먹을 거라고. 내심 적잖이 놀랐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기로 했지요.  

  성네 집에 놀러갔던 생각이 났어요. 국문과 여학생들 중에서 성과 나는 유독 죽이 잘 맞았지요. 지금도 눈에 선해요. 허허벌판에 있는 성네 이층집은 복숭아과수원이었어요. 달빛 환한 봄밤에 복숭아꽃이 피면 성네 집은 말 그대로 무릉도원이었지요. 우린 걸핏하면 성네 집에 모여서 통키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이야기도 했지요. 어느 날 성네 어머님이 닭볶음탕을 만들어주셨어요. 도래소반에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데 볶음탕 안에 고춧가루 덩이가 떠 있는 게 보였어요. 수저로 깨뜨렸더니 그 안에 구더기가 죽어있었어요. 지금도 벌레라면 삼천리나 도망가는 내가 그 땐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아주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들이 지나갔어요. 닭요리를 먹지 말고 다른 반찬만 먹을까? 아님 아예 수저를 놓을까? 그러다가 그냥 아무 내색 안하기로 했어요. 물론 구더기는 가만히 건져서 상 한쪽으로 숨겼지요. 볶음탕 안에 들어있는 구더기보다 먼저 이 요리를 만든 성네 어머님을 생각했지요. 딸 손님들 왔다고 시장까지 다녀오시고 이리저리 분주히 다니면서 해 주신 요리잖아요. 그 마음이 내게 닿았지요.  

  눈높이라는 말이 사회에 막 유행하면서 나름대로 신선한 자극을 주던 때가 있었어요 유치원생들을 데리고 시장에 다녀온 선생님이 '여러분 시장에 가니 무엇이 있어요?'라고 묻자 아이들이 '사람요'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거리기도 했던 기억이 나요. 각자 자기 일을 하던 우리들이 모였던 날, 성이 내게 아이들을 눈높이에서 대하라고 했던 말 기억해요? 그때 성은 우리들보다 먼저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눈높이로 대하라는 말이 그 땐 쉽게 들렸어요. 그냥 아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고 아이들하고 격의없이 잘 어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면 그게 눈높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가 '너무 격이 없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아이들이 너무 친하게 굴어 난감한 적도 많이 있었어요. 오해를 산 적도 있고요. 직장생활 하고, 사회활동도 하면서 그만그만한 상처를 무수히 주고받은 후에야 비로소 '눈높이'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데요. 

  눈높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함정 내지는 조건을 곰곰 생각해 보았지요. 눈높이를 맞추려면 일단 발부터 맞추어야 하고, 발을 맞춘 다음엔 가슴까지 완전히 맞추어야 눈높이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데요. 상대가 가고 있는 발길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 가를 이해해야 하고, 왜 그 쪽으로 길을 잡았는지도 깊이 이해해야 비로소 눈높이가 맞추어 지데요. 서로 발을 맞추면 가슴을 이해하게 되데요. 그렇게 눈높이를 맞추면 통제를 하지 않게 되데요. 명령을 하거나 요구하지 않고 서로 나누게 되데요. 그 후론 되도록이면 상대의 발길부터 이해하려고 노력하지요. 아니 어떤 사람은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스며들기도 하더라고요.  

  세숫대야에 김치를 버무리고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 아이가 스며들었어요. 일찍 부모 품을 떠났으니 살림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것조차 배워 본 적이 없을 거예요. 그냥 김치 버무릴 만한 크기의 그릇을 찾다가 세숫대야에 버무렸겠지요. 객지생활하면서도 김치나 반찬을 사다먹지 않고 집에서 늘 해 먹는 그 애는 지금까지 그렇게 먹었을 게고요. 그렇게 20년 넘게 세숫대야에 김치 버무려 먹었어도 그 아인 아주 건강하거든요. 나도 아무 거리낌 없이 그 김치를 먹기로 마음먹었지요. '밥 먹자'는 소리에 부엌에 나가 보았더니 방금 버무린 겉절이 김치가 아주 맛있어 보이네요. 원래 갓 담은 김치를 좋아하는 나는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요. 설거지 끝내고 김치 세숫대야에 담았다고 한 입도 안 먹은 일행이 묻데요. '정말 김치 맛있어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웅숭깊은 소리로 대답했어요. '응'

▲ 세숫대야 김치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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