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반에 짧은 기간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대개 나이가 많으신 할머니들이에요. 같은 연배인데도 할아버지들은 한글 미해독자가 거의 없어요. 할아버지들은 아들이라서 서당이라도 다녔지만 할머니들은 딸이라서 학교는커녕 집안일에 붙들려 세월이 가버린 거지요. 정읍에서 오신다는 할머니는 70세가 훌쩍 넘으셨어요. 기차를 타면 정읍 읍내 나가는 것보다 김제 오는 게 더 편하다는 할머니는 한 번도 결석이나 지각을 하지 않으셨지요. 몸도 구부정하고 허리도 아프신데 집에 손자나 자녀들이 가르쳐 주면 저 고생을 하시지 않을 텐데 혼자 사시는 할머니 같아서 마음이 짠했지요. 

  어느 날 '한글을 배우면 맨 처음 하고 싶은 일'을 발표하는 시간이었어요. 하고 싶은 일들도 다양했지요. 손녀와 편지를 주고받고 싶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다가 한 번 인사치레로 손녀가 할머니에게 편지를 쓸지는 몰라도 전화나 이메일이 익숙한 아이들과 편지 주고받기가 어려울 것 같았어요. 시장에 가서 간판을 읽어보고 싶다는 할머니도 있었고, 버스를 혼자타고 다른 지역에 가보고 싶다는 할머니도 있었어요. 정읍 사시는 할머니 차례가 되었어요. 참 수줍음을 많이 타는 할머니였지요. 여간해서 말씀을 안하시는 걸 다른 사람들이 채근하니 할 수 없이 아주 조그만 소리로 발표하기 시작했어요.

  '젊은 날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써보는 것'이 할머니가 한글을 배우면 맨 처음 해보고 싶은 일이래요. 부모님이 맺어주는 대로 얼굴도 모르는 채 시집와서 그냥 살았대요. 제대로 얼굴 쳐다보며 말도 못하는 신혼시절이 어렵고 두렵기만 했대요. 막 정이 들 무렵 남편이 집 앞 저수지에서 고기를 잡다가 세상을 떠났다네요. 열여섯에 시집와서 열아홉에 남편이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유복자 아들 하나를 기둥삼아 평생을 혼자 사셨다네요. 아들이 자라 공무원이 되고 며느리도 잘 얻어 나무랄 데 없는 효자효부라네요. 손자 손녀들도 사랑스럽고 할머니를 잘 따르지만 할머니가 직접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네요.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써서 남편 무덤에 찾아가 보고 싶다네요. 코끝이 찡해졌어요.

  한글수업을 더 이상 할 형편이 못되었어요. 새 선생님이 오신 날, 나는 정읍 할머니 이야기를 새로 온 선생님께 해 드렸어요. 그리고 할머니가 편지를 쓸 만큼 한글을 깨우치면 꼭 연락을 달라고 했어요. 정읍할머니를 생각하면 강의를 그만두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거든요. 여러 달 후 연락이 왔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고요. 한달음에 가보았지요. 연필에 침 발라가며 공책귀퉁이 꼭 붙잡고 쓴 할머니 편지는 간단했어요.

  <잘 계시지요. 잘 있어요. 식이는 잘 커서 공무원해요. 나 사랑해요. 나 글씨 알아요>

  정말 오래 걸렸구나, 사랑한다는 저 말 한마디가 할머니 가슴을 열고 나와 할아버지에게 가는 일이 참 오래 걸렸구나. 지금도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말, 사람들이 너무 흔하게 써서 이제는 가벼워지기조차 한 말.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정말 오래 걸려서 했구나. 이 말 하고 싶어서 일주일에 두 번씩 기차를 타고 낯선 고장까지 한글을 배우러 다니셨구나. 준비해 간 꽃다발을 할머니께 드리고 내친 김에 할아버지 무덤까지 태워다 드리겠다고 나섰더니 할머니 귓불이 확 달아오르시데요. 그냥 낼 혼자서 천천히 다녀오겠다며 김제역으로 가시데요.

  올레길을 걷는데 진달래가 여기저기 피어있어요. 길을 걷다가 늦게 핀 진달래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어요. 왜 이렇게 늦게 왔는지 모르지만 봄 진달래꽃이 무더기로 피었을 때와는 눈을 맞추는 느낌과 무게가 달랐어요. 꽃 피기 좋은 봄날같은 신혼 때 사랑하다는 말 미처 하지 못하고 인생의 겨울 한 복판에서 이제야 사랑한다고 편지 고백을 하는 할머니 편지 같아서요. 너무 늦게 피었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애틋했지요.

▲ 겨울진달래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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