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엔 비가 무섭게 내렸습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거센 빗소리에 깨어 도라지 꽃밭을 생각했어요. 밤새 이 비를 맞을 텐데 어쩌나.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온 가슴에 멍이 드는 것 같았습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도라지꽃밭으로 가봤습니다. 비바람에 쓰러져 비스듬히 누워버렸지만 막 세수를 한 말끔한 얼굴로 여전히 방글방글 웃어줍니다. 차를 먼저 돌려놓고 와서 저와 천천히 정담을 나누어야지, 했지요. 길이 끝나는 도라지 밭머리 좁은 빈터에서 돌려 와야 하거든요. 어라, 그런데 그곳에 이미 차가 주차되어 있습니다. 그 틈새로 차를 돌려보기로 합니다. 후진을 해서 꽁무니를 들이밀긴 했는데 전진이 안 됩니다. 오르막에다 땅이 질어 미끄러지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 애써봤지만 더 뒤로 밀려나기만 할 뿐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차 주인을 찾아보려고 여러 번 큰소리로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경적을 울려볼까 하다가, 일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망설여졌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올라오지 않는 산의 막다른 길로 접어들 때마다, 밭에서 땀으로 멱을 감으며 일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곳에 올 일이 뭐가 있을까 하며 저를 훑어보곤 했었거든요. 아뿔싸, 전화기도 안 가져 왔네요.

  일단 차를 두고 산을 내려가서 도움을 청해보기로 했습니다. 복숭아밭을 지나는데 사람이 보였습니다. 반가워서 들어가 보니 따온 복숭아를 손질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는 아주머니입니다.
  "차가 빠져서 그러는데 전화 한 통화 쓸 수 있을까요?"
  바쁜 일손을 놓고 전화기를 빌려줍니다. 그런데 저런, 남편은 멀리 출장 중이네요. 사륜구동을 넣어 보라는 둥, 보험회사에 전화를 해 보라는 둥 입으로만 한 몫 합니다. 그 때 주인아저씨가 트럭을 몰고 들어섰습니다. 사정을 들으시더니 검게 그을린 얼굴로 뚝뚝하게 한마디 합니다.
  "가 봅시다."
  복숭아밭 아저씨가 시동을 걸고 다시 엑셀을 밟아보지만 여전히 제자리에서 헛바퀴만 돌뿐 차는 꼼짝도 안합니다. 뒤로 더 밀려났다간 아래로 굴러 떨어질 판이라 더럭 겁이 납니다. 그때 인삼밭에서 모자위에 수건을 덮어 쓴 아주머니가 나왔습니다. 약을 주느라고 몰랐다며 연신 줄줄 흐르는 땀을 훔칩니다. "차 빼기 틀렸어요. 이곳에 빠지면 그냥은 못 나와요" 하고 자신의 차를 저만치 빼놓고는 바퀴 뒤에 돌을 놓아주면서 묻습니다.
  "여기를 뭐 헐라고 올라 왔대요?" 도라지꽃을 보러 왔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아서 우물쭈물 하다가 멋쩍게 웃어보였습니다. 도라지꽃도 멀뚱멀뚱 바라볼 뿐입니다.
 
  언제 다시 내려갔는지 복숭아밭 아저씨가 트랙터를 몰고 올라왔습니다. 체인을 걸어 끌자 차는 쉽게 빠져 나왔어요. 인삼밭 아주머니는 다시 약을 주러 가고 복숭아밭 아저씨는 트랙터 안에서 후딱 가라고 손짓을 합니다. 사례를 해야 할지 여쭤 보지도 못했습니다. 인정을 돈으로 따진다는 것이 큰 실례가 될 것 같았기 때문에요. 그저 고개만 몇 번이고 주억거리고는 산을 내려왔습니다.

  도라지의 진짜 멋을 진즉 알고 있는 사람은 농부입니다. 실한 도라지 뿌리를 거두려고 3년 이상 가꾸고 기다립니다. 제겐 꽃만 보이지만 농부는 속내를 보는 게지요. 산삼도 아니면서 도라지는 안간힘을 씁니다. 향긋한 맛을 뿌리에 쟁이느라 꽃엔 향기도 없습니다. 나무가 그 본질에 따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사람도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나타내는데요.

  올 여름에 저는 그 집 복숭아를 많이 먹을 것입니다.
 

▲ 도라지꽃

디지털 김제시대  gimje@g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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